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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롤리타 1

merone 2013. 2. 7. 16:07

*롤리타au, 스란엘 등 끼얹을 가능성 농후




0.

 요정의 인상착의를 적어둔다. 키는 4피트 반에서 5피트 사이. 대략적으로 추측컨대 4.7피트 정도라고 해두자. 머리칼은 짙은 흑색. 피부는 깨끗하고 투명하다.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특이한 반점이나 흉터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나오는 요정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주근깨도 장난스럽게 일그러지는 눈물점도 없는 희고 깨끗한 살갗이다. 이따금 새벽 어스름의 푸른 빛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인어의 피부처럼 창백한 푸른색으로 보인다고 덧붙인다. 눈은 희미한 잿빛. 가끔 글자를 읽어 나갈 때면 희미한 불꽃이 타오른다. 대체로 이 작은 요정의 홍채는 부드럽게 풀어져 먼 곳을 바라본다. 손발은 작고 희다. 손가락은 가늘고 길며 끝이 야무지고 손바닥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포동포동한 살 대신 부드러운 곡선과 주름으로 이루어진다. 발은 같은 키의 또래에 비하여 손가락 반 마디만큼 작다. 새 신발을 살 때마다 그의 발에 맞는 신발을 사기 위해 애를 먹은 기억이 난다. 발목은 가늘고 여려 성인 남자라면 한 손으로도 쥘 수 있을 정도다. 검은 옥스퍼드 슈즈를 신기면 탁, 탁하고 새의 작은 발소리를 흉내 낸다. 어느 무대 위의 탭댄서도 그 가냘프고 가벼운 움직임을 흉내 낼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푸른 셔츠 아래로 비치는 견갑골은 우묵하게 얕은 그림자를 만들고 덜 자란 뼈마디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헤아릴 수 있다. 부드럽게 둥근 척추를 문지르며 더듬어나가면 간지러운 듯이 허리를 한쪽으로 접으며 등을 오목하게 휜다. 동그랗게 패인 배꼽은 여린 붉은 살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마도 열매의 꽃받침이 붙어있던 자리가 그렇게 생겼으리라.



1.

「엘론드. 손님 좀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니.」 

 집주인은 불타는 붉은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길갈라드는 그와 같은 먼 친척이 있다는 사실도 숙부 키르단에게 전해들은 뒤에야 알았다. 집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대체로 두 사람에서 네 사람이 살기에는 알맞은 크기처럼 보였다. 집주인 마글로르의 표정은 길갈라드를 반기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달리 홀대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길갈라드는 이처럼 무표정하고 살갑지 못한 집주인의 집에서-아무리 친척이라 하더라도-지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이내 생각을 거둔다. 마글로르의 모습 뒤로 나타난 소년은 눈만 끔벅인다. 맨발로 차박차박 복도를 걸어 나와서는 길갈라드를 훑어보곤 그저 무심하게 근방에 놓여있는 양아버지의 구두를 신는다. 발을 옮길 때마다 구두가 껄덕거린다. 검은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발을 옮기는 소년은 풍채 좋은 양아버지의 어디도 닮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소년은 작은 발에는 아직 큰 구두를 벗었다가, 다시 신었다가, 다시 발끝에 걸고 탁탁 털어내는 사이 길갈라드는 엘론드가 하는 양을 문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엘론드는 복도를 반쯤 걸어가고 나서야 손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뒤를 돌아본다.「이쪽이에요.」말소리에는 높낮이가 없다. 길갈라드는 작은 집주인이 걷는 대로 속도를 맞추어 차근히 복도를 걷는다. 작은 집주인은 오른쪽 신발이 벗겨져 나가 콩콩거리며 돌아와서 다시 신발을 끌며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기 시작한다. 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무릎부터 들어 올려 구두의 앞코를 겨우 층계에 걸쳐 올린 뒤에 다리를 주욱 끌면 구두굽이 층계참에 걸린다. 「엘론드.」아래에서 마글로르의 목소리가 소년을 부르지만 소년은 뒤에 선 손님의 얼굴을 훑고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신발을 끌었다. 손님은 소년을 지나치지도 서둘러 재촉하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소년이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는 것을 기다린다. 옷가지와 서적이 가득 든 네모난 여행가방 덕분에 길갈라드의 팔이 슬며시 저려와도 길갈라드는 소년이 한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다음 계단을 밟는다. 소년의 희고 가느다란 다리가 진흙탕 속을 힘겹게 걷는 것처럼 느린 근육 운동을 하는 것을 그는 말릴 생각이 없었다. 길갈라드는 소년의 발에 신긴 구두가 계단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르는 사이 계단에 깔린 때타고 낡은 붉은 러그를 바라본다. 손톱 마디만큼도 되지 못하는 투명하고 작은 거미가 천천히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엘론드는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는 변덕처럼 아버지의 구두를 모두 벽에 부딪히도록 벗어놓고 난간을 쥔 채로 좁고 짧은 복도를 걷는다. 말없이 눈짓으로만 손님이 머물 방을 가리켰을 때, 길갈라드는 한참이나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어린 아이에게 혼나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여행 가방을 고쳐쥐고 잰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방 안은 지저분하고 정겹다. 낡은 카페트는 이곳저곳 커피나 짙은 색의 액체가 쏟아진 흔적들이 남아있고 책장은 제때 잘 닦아주지 않은 듯 나무 광택 대신 곳곳에 나무결이 헤진 흔적들이 보인다. 길갈라드는 책상 위에 안개처럼 쌓인 먼지들을 손바닥으로 훑어낸다. 작은 집주인은, 큰 집주인 보다는 집에 새로운 식구를 받아들이는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깨죽지를 완전히 덮은 교복처럼 넉넉한 흰 셔츠를 입고 맨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서가의 먼지를 불거나 쓸어보며 방을 배회하다가 변덕처럼 그가 좋을 때에만 얼굴을 돌린다. 칠이 벗겨져 드문드문 검게 삭은 속살이 드러나는 창 너머로 흰 햇살이 부서져 소년의 얼굴 위로 쏟아진다. 소년은 한쪽 눈썹만을 찡그리면서 말한다.

「마글로르가 카페트는 조만간 새걸로 바꾼다고 했어요.」

 그의 말에서는 ‘그렇게 전하랬어요’하는 어른의 주문이 그대로 엿보인다. 엘론드는 다시 얼굴을 돌리고 발바닥으로 카페트를 이리저리 밟으며 이제는 타인의 방이 될 방 안을 걷고, 뛰고, 날아다닌다.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카페트의 끄트머리만 밟았다가 다시 온 발바닥으로 얼룩을 문대고 작은 입술로 온 방 안의, 모든 창문 틈의 먼지를 불어낼 것처럼 군다.


 「저기는 제 방이고요.」

 길갈라드는 새카만 밤을 닮은 검은 단발머리가 소년의 목덜미를 스치는 찰나를 눈에 담는다. 엘론드는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손으로 곧 길갈라드의 방이 될 방의 건너편에 있는 문을 가리킨다. 흰 칠이 벗겨진 문의 문고리를 문에 매달려 돌리고 소년은 문을 반 뼘만큼만 열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길갈라드는 꼭 저렇게 문을 열어야 하는지 어른 된 마음으로 소년이 하는 양을 조용히 관찰한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엘론드는 한참이나 길갈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얼굴이 딱 반절만 드러나 길갈라드의 눈과 마주쳤다가, 곧 문이 닫힌다. 낡은 문에서 흔히 나는 크고 삐걱대는 소리다. 기름을 사다가 경첩에 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길갈라드는 여행 가방을 먼지 앉은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잠시 무언가에 홀렸던 듯하다. 



2. 

 요정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과도 다르고 셰익스피어의 퍽(Puck)과도 다르다. 뭇 작가들이 말하는 어린 님프, 요염하고 유혹적인 님펫들과도 다르다. 대개의 요정들은 처연한 슬픔에 목말라있다. 열두살에서 열다섯살, 많게는 겨우 열일곱에 다다르는 나이에 그만한 처연함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온 몸을 흐드러지게 무너트리는 슬픔이란 겪기 힘든 일이다.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요정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 요정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최근에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사람이거나,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이거나, 깊은 슬픔으로 분노에 잠겨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는 요정을 알아보고야 말았다. 



3.

 마글로르의 하숙인이 된 길갈라드는 곧, 마글로르와 엘론드가 그렇게 친한 부자사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소년은 늘 양아버지의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면서도 막상 마글로르가 이름을 부르면 두 걸음 이상의 거리를 두고 다가간다. 아버지의 튼튼한 팔을 붙들고 매달려 그네를 타는 일도 무언가를 만들어달라고 발을 구르는 일도 없다. 말없이 아버지를 부를 때에는 꼭 두 걸음 만큼 뒤에서 마글로르의 옷깃을 붙잡는다. 마글로르는 익숙한 몸짓으로 전화를 하거나, 가계부 위를 꼼꼼하게 채우다가 엘론드를 돌아본다. 「엘론드.」이름을 불리워도 소년은 대답하지 않는다. 소년은 냉장고를 가리키거나, 발로 바닥을 두 번 동동 구르고 문 밖을 가리킨다. 그의 양아버지는 소년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마치 작은 집주인에게 세를 들어 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또는 크게 빚진 것을 갚는 부모처럼 서둘러 전화를 내려놓고 냉장고 안에서 시원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내어주거나 소년의 발에 흰 운동화를 신겨 끈을 묶어주곤 놀다오도록 현관문을 열어준다. 현관문을 열어주기 전에는 꼭 손가락을 접어 시간을 알려준다. 엄지와 검지를 접어 셋을 말하면 오후 세시까지는 집에 돌아올 것, 새끼손가락을 펼치면 친구의 집에 폐가 되지 않도록 저녁 식사 시간 전에는 돌아올 것 등. 

 손님은 그 모든 조용하고 음울한 부자의 관계를 2층의 계단 난간 위에 몸을 기대고 지켜본다. 부자의 관계는 어설프다. 마글로르는 소년에게 최대한의 부모노릇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엘론드는 그에게 친자식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길갈라드는 난간 위에 내려놓았던 머그컵을 들고 방으로 들어선다. 집에 소년이 없는 시간만이 그가 집중해서 일을 마칠 수 있는 시간이다. 소년을 내보낸 양아버지는 현관의 깔개 위에 소년에게 손가락을 접어 시간을 알려주던 자세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문 밖을 내다본다. 바람이 일 때마다 붉은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에 손님은 관심이 없다.



4.

 소년은 동화 속에서 나온 요정보다도 훨씬 못한 교태와 애정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어설픈 손짓과 꾹 다물어버리는 옅은 분홍빛의 입술. 소년은 길갈라드가 안경을 쓰고 타이포에 집중할 때에만 방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살그머니 발꿈치를 들고 들어와 서가에 꽂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도미노처럼 넘어트리고는 그 사실을 길갈라드가 알아채기 전까지 다시금 문틈에 숨어 젊고 잘생긴 손님을 지켜본다. 엘론드는 이따금 그의 눈길을 사로잡고 싶은 것처럼도, 단순히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 것처럼도 보였다.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리면서 문 틈사이로 엿보는 눈과 마주치면 소년은 그제서야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는다. 아마도 쑥스러운 마음에 탁 소리가 나도록 재빠르게 문을 닫고 싶었겠지만 여전히 기름칠이 되지 않은 문은 삐그덕 거리면서 영 엘론드가 원하는 때에 맞추어 제대로 닫혀주지 않는다. 길갈라드는 타이포 위에 놓여있던 종이를 빼 잉크로 한켠에 종이를 눌러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전히 문고리와 씨름을 하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결코 서두르거나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카페트를 디뎌 소년이 손으로 쓰러트린 책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엘.」

 엘론드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다. 길갈라드는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단순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책을 밀어 넘어트리는 그 몸짓이 소년에게 그리 재미있는가 싶어 이름을 불러보는 것뿐이다. 

 

 날이 지나면, 소년은 천천히 방문을 열고 드나들기 시작한다. 손님의 서재 겸 침실과 아이의 침실은 마치 처음부터 문이 없었던 것처럼 이어져있다. 길갈라드가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거나,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등을 뒤로 약간만 기울이면 온통 하늘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아이 방이 들여다보인다. 소년은 결코 그 나이에 걸맞는 분주함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엘론드는 침대 위와 카페트 위를 뒹굴며 책의 삽화를 넘겨보고, 다시 처음부터 작은 목소리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소리 내어 읽는다. 무뚝뚝하고 높낮이가 없는 어리고 처연한 목소리로 동화책에 나오는 옆집 아주머니 역의 대사를 읽는 소년은 사랑스럽다. 세상의 모든 레몬맛과 라즈베리맛 캔디를 소년의 방 안에 가득 깔아주고 싶을 만큼 소년의 색채는 옅고 우아하고 사랑스럽다. 

 카페트 위에 배를 깔고 누워있던 엘론드와 눈이 마주치면, 엘론드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어느 날은 자신의 방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어느 날은 길갈라드의 서재 구석에 놓인 푹신한 소파 위에 두 다리를 모두 옹송그리고 앉아 바닥에 굴러다니는 신문을 주워 읽는다. 

「의원은, 의장에게, 반론을, 제기했다.」

 소년은 소파 위에 올라간 두 다리로 팔걸이를 톡톡 찬다.「의장이 뭐에요?」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해 본 뒤에야 묻는 얼굴을 보면서 길갈라드는 웃으며 손짓을 한다. 

「이리 가져와봐. 엘. 」

「의장이 뭔데요?」

 엘론드는 팔걸이 위에 오금을 걸치고 길갈라드를 바라보다가 손짓만 되풀이하는 손님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참,」말 끝에 몽글몽글 퍼지는 한숨소리가 귀여워 길갈라드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웃는다. 엘론드는 헤진 민트색 소파 위에서 뛰어내리고 신문을 한 손에 든 채로 길갈라드에게로 걸어온다. 허리둘레가 조금 큰 반바지를 손으로 추스르고 책을 들고 있는 길갈라드의 두 팔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으면서 땅을 디디고 있는 성인 남자의 두 무릎 사이를 몸을 비틀어 열었다. 

 「의장이 뭔데요?」

 엘론드의 손에 들린 신문을 건네받는 동안 엘론드의 시선은 길갈라드의 손에 들려있던 책으로 옮겨간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듣는, 말을, 재-재분석, 하는 경향. 경향이 있다.」그 사이를 참지 않고 다시 책을 읽어나가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길갈라드는 한 손으로 소년의 허리를 번쩍 안고 허벅다리 위에 앉혀준다. 허공에서 흔들리던 발이 길갈라드의 무릎 뒤를 아프지 않게 찬다. 

 「의장은」

 그렇게 말을 꺼내면 소년은 다시 책의 구절을 짚는다.

 「듣는 말을 왜 재-재분석해요?」

 소년은 R발음을 아주 작게, 입 안에서 혀를 작고 동글게 말아 발음한다. 그리고 단어가 헷갈리는 듯이 두 번 말한다. 

 「엘.」

  길갈라드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엘론드의 작은 어깨가 들썩이고,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마른 팔꿈치가 길갈라드의 가슴팍을 누른다. 민무늬의 얇은 여름셔츠 위로 소년의 팔이 스칠 때마다 길갈라드는 마른 입술을 축인다. 남색 반바지 아래로 비어져 나온 다리가 다시 이제는 리듬을 타는 것처럼 톡, 톡, 길갈라드의 정강이뼈를 두드린다. 한 단어를 읽을 때마다 한 번씩. 허벅다리 위에 불안하게 앉은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단단히 잡아 안으면 마디가 굵은 어른의 손 위로 작은 손이 돌아다닌다. 다 펼쳐도 길갈라드의 손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것처럼 작은 손을 엘론드는 둥글게 모아 손끝으로 두꺼운 뼈마디를 매만진다. 검지의 뼈마디를 이리저리 우그러트리고, 중지의 손톱을 결을 따라 문질러 본 다음, 새끼손가락을 손 안에 쥐고 이리저리 살결을 비튼다. 

 책의 무게가 슬슬 힘에 부쳐오기 시작하면 엘론드는 몸을 비스듬히 길갈라드의 품에 기대어온다. 길갈라드에게 책을 맡겨 놓고 몸에 힘을 뺀 다음 가슴께에 몸을 웅크려 기대고 손만 뻗어 책장을 하나, 둘 넘긴다. 소년의 살결에서는 달착지근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냄새가 난다.  

 「엘.」

 아이의 발가락이 발목부터 종아리를 느리게 문지르기 시작한다. 길갈라드는 참지 못하고 이름을 부른다. 창자 아래가 느리게 물이 끓듯 달아오른다.

 「읽는 중이에요.」

  소년은 귀찮다는 말투로 길갈라드의 목소리를 끊어낸다. 엷은 색소를 가진 눈이 부드럽게 활자를 보며 타오른다. 「일면, 릴리 여사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라틴어, 어-어형 변화, 변화표가 문법의 고유한,」「아름다움.」「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엘론드는 드문드문 문장을 이어 읽고 그렇지 않아도 아주 작은 얼굴 사이에서 고작 손가락 한마디도 되지 않는 미간을 잔뜩 지푸렸다가 천천히 편다.

「라틴어 할 줄 알아요?」

 길갈라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아이는 허벅다리에서 미끄러진 엉덩이를 재차 움직여 다시 허벅지 위에 올라앉는다. 곰실곰실한 손길이 양복바지 아래에서 직각으로 굽어진 길갈라드의 무릎을 둥글게 문지른다.

「조금.」

「가르쳐줘요.」

  길갈라드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낀다.

「마글로르씨가 라틴어를 잘 하는 걸로 알고있는데.」

  소년은 잠시 입을 닫았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버지한테는 싫어요.」

「엘.」

 색이 엷은 입술이 뾰로퉁하게 튀어나왔다가, 「엘?」하고 다시금 이름을 부르면 이번에는 허벅지 위에서 바닥으로 풀썩 뛰어내린다. 작은 발이 무게를 싣고 길갈라드의 발등을 찍는다. 아! 작은 비명을 지르는 사이 엘론드는 길갈라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에서 책을 빼앗아 표지를 덮는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갈피가 끼워지지 않은 채다. 힘껏 화가 났다는 표시를 내려고 온 몸으로 힘을 주어 걸어도 카페트 위를 구르는 발은 콩콩거리는 소리 밖에 내지 못한다. 

「엘.」

 소년은 아직도 답이 없다. 문 틀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문을 닫는다. 문의 경첩은 비스듬히 떨어져내려 제대로 아귀에 맞지 않고 덜렁거린다. 길갈라드는 한숨을 쉬고, 숨을 깊이 들이쉰다.

 「엘리.」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문틈 사이로 높은 소리로 내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엘론드?」아이의 신경질 적인 소리에 마글로르가 층계참을 반쯤 올라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괜찮습니다. 내려가 보세요.

 길갈라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엘론드의 양아버지가 무슨 직업을 가졌던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단순히 소싯적에 라틴어와 관련된 언어에 능통했던 사람인 것만을 알고 있다. 오래전 키르단 숙부가 스치듯 일러준 것에 지나지 않다. 마글로르가 다시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리면 길갈라드는 몸을 일으켜 사무용 의자에서 일어선다. 엘론드가 찍어놓은 발등이 아릿하다. 

 「엘. 들어가도 괜찮니?」


 「안돼요.」


 「미안하다.」

 「안미안해 하셔도 돼요.」

  솔직하게 굽히고 들어가면 아이의 목소리는 풀이 죽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 아이는 팔에 얼굴을 묻고 침대 위에 엎드려있다. 길갈라드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소년의 크림색 홑이불 위에 앉는다. 큰 손으로 엘론드의 등을 나른하게 문지르면서 단발머리가 스치는 목덜미를 바라본다. 아이의 머리는 또래에 비해 길다. 마글로르는 아이의 머리가 길도록 내버려 둔다. 

 「마글로르씨랑 싸웠니?」

 아이의 침묵은 낮잠만큼이나 길었다. 엘론드는 겨우 얼굴을 들고, 출렁이는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꼼지락거려 다리를 모으고 앉아 길갈라드를 바라본다. 「아니요.」그 다음에는 등을 쓰다듬는 팔 아래로 머리를 내밀고 가슴께에 뺨을 기대며 안겨온다. 

 「마글로르씨와 사이가 안좋니?」

 엘론드는 대답 없이 눈만 깜박거린다. 소년은 마글로르에게도 이렇게 안겨있는 법이 없다. 두 사람의 사이는 무어라고 말하기 힘든 긴장감으로 차있다. 엘론드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배우는 것 등 모든 종류의 것을 양아버지에게 의지하지만 마글로르를 보고 환하게 웃지 않았다. 엘론드는 주인에게 얻어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마글로르의 주변을 조심스럽게 맴돌고, 마글로르는 버린 개를 도로 주워온 주인처럼 엘론드의 주변을 맴돈다. 종종 아이를 품에 안고 마글로르와 눈이 마주치면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등줄기를 차갑게 식힐 정도였다.

 아이는 눈꼬리에 눈물이 질정도로 길게 하품을 한다. 잠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느리게 좌우로 흔드는 아이를 보다가 길갈라드는 아이가 편하게 기대어 앉도록 자세를 고쳐준다. 아이는 졸리다는 말도 없이 얕은 낮잠에 빠진다. 길갈라드는 팔 하나, 고개 하나, 다리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아이가 안겨있는 대로 오로지 아이의 단잠을 깨우지 않는 것에 집중한다. 아이의 입술에는 오전에 먹은 딸기물이 붉게 들었다. 


5.

 「엘, 가만히.」

 「간지러워요.」

 엘론드는 잿빛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허리를 접으면서 까르륵 웃는다. 듣기 힘든 웃음소리에 마글로르가 고개를 들고 아이를 돌아본다. 아이는 마치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길갈라드의 품으로 뛰어들어 안겨들고 한참을 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거린다. 엘론드는 손을 뻗어 길갈라드의 입술에 물려있는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떨어트린다. 길갈라드는 입 안에 남은 연기를 공기 중에 흩어내면서 엘론드의 수영복을 고쳐 입혀준다.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매듭지은 리본을 한 번 더 양 끝으로 잡아당긴다. 흰 크림을 얼굴에 발라주면 살결이 이리저리 밀리는 것이 괴로운지 고개를 흔든다. 고개를 흔들어 손길을 떨쳐내도 길갈라드가 다시 뺨을 붙잡으면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차렷 자세를 하고 선다. 

 마글로르는 이번 여름에야 말로 엘론드를 보이 스카웃이나, 캠프에 보내려는 셈이었던 것 같지만 엘론드는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엘론드가 한번 고개를 저으면 마글로르는 힘없는 용사처럼 굴복해버린다. 길갈라드는 점점 그 두 사람의 묘한 무게중심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글로르는 얕은 호수의 맞은편에서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펼친다. 엘론드의 (그다지 친해보이지는 않는)학교 친구들, 그리고 몇몇의 부모들이 반대편에서 마글로르의 주변에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안가도 되겠니?」

 「괜찮아요.」

 「정말로?」

 「수영 하실거에요?」

 아이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기 시작했다. 그 쑥스러움이 그득 담긴 존댓말이 자신에 대한 약간의 수줍은 애정임을 길갈라드도 눈치 채기 시작한 터였다.

 「나는 여기 앉아있을 거야.」

 아이는 뺨에 과자를 가득 넣은 것처럼 부풀렸다가 뜨겁게 달궈진 돌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만을 교묘하게 밟고 호숫가까지 내려간다. 발끝만 살짝 담궜다가 곧장 온 발을 오므리면서 다리를 빼낸다. 

 「엘론드.」마글로르의 목소리는 낮고 슬프고, 엘론드의 앞에서만 가녀리다. 엘론드와 길갈라드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모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듯 마글로르는 잠시 말에 뜸을 들인다.「곧 점심이니까 무리하지 말아라.」「네.」소년은 친구들의 무리가 놀고 있는 곳에서 세네걸음 쯤 떨어진 곳에서 발로 물을 찬다. 길갈라드가 던져준 비치볼을 팔에 안고 물 위를 잠시 떠다니다가 곧 물가의 자갈을 뒤집는다. 이따금은 물 아래에서 개구리가 뛰쳐나와 엘론드는 얼굴에 잔뜩 튄 비리고 차가운 물을 흰 팔로 문질러 닦는다. 

 엘론드는 친구들 사이에서 겉돈다. 친구들은 모두 소년보다 키가 반 뼘 씩 크고 우아하고 느린 그 지방의 사투리로 이야기한다. 길갈라드는 엘론드의 말투가 이 지방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겨우 알아채곤,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아이는 양아버지의 밑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다른 아이들이 이 지방에서 나고 자라 충분히 익힐만한 사투리를 익히는데 걸리는 시간만큼은 여기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 엘론드는 아버지와 함께 이사를 왔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언어만큼은 표준어에 가까운 더 또렷하고 고저가 없는 말을 사용했다. 친구들은 때로 그 말투가 너무 젠 체를 한다고 수근 거린다. 엘론드의 말에는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지 않는 오래되고 낡은 어휘들이 섞여 들어간다. 그것도 아이들에게는 젠 체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마도 오래된, 요즘은 쓰이지 않는 말들은 한 때 라틴어에 아주 능했다는 아이의 양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것이다. 

 「엘론드.」

 길갈라드는 마글로르가 엘론드를 부르는 양을 지켜본다. 아이는 차가운 샌드위치를 하나쯤 집어 먹은 뒤에 반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긴 블루베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발간 입술과 흰 손 끝에 푸른 물이 드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손끝은 완전히 푸른 물이 들어 못된 장난을 하고 돌아온 아이의 전리품처럼 보인다. 엘론드는 아직 입술을 오물거리는 채로 흐르는 물가에 손을 가져다 대지만 물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파란 물을 들이고 마글로르를 돌아보면 마글로르는 이리 오라고도, 가서 놀라고도 하지 못하고 애틋하게 웃는다. 소년은 얕고 좁은 호숫가를 참방참방 물소리를 내며 걸어와 발치에 앉는다. 

 「엘?」

 소년은 물에 젖은 몸을 따듯한 돌 위에 앉아 말리다가 길갈라드를 돌아보며 웃는다. 그는 손을 뻗어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준다. 아이는 눈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사랑스럽게 눈을 두 번 깜박인다. 「물 들어갔니?」소년은 다시 말 없이 눈을 오랫동안 꾹 감았다가 뜬다. 완만한 경사가 진 비탈을 네 발로 천천히 기어와 길갈라드의 두 팔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고는 젖은 몸 그대로 길갈라드의 흰 셔츠를 끌어안는다. 

 「피곤하니?」

 아이는 흰 셔츠가 푹 젖도록 얼굴을 부빈다. 엘론드의 학교 친구들은 저들끼리 한참이나 더 물놀이를 하다가 길갈라드를 흘긋 바라본다. 아이들의 차가운 시선은 아주 잠시만 엘론드의 흰 등에 머물렀다가 사라진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물놀이하는 소리만 천천히 울려 퍼진다. 길갈라드는 소년이 얼굴을 가리우고 품 안에 웅크리는 이유를 알아챈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엘?」

 엘론드는 여전히 꿈적도 하지 않는다. 셔츠가 눅눅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든다. 길갈라드는 곁에 놓여있는 크고, 따듯하고, 잘 마른 볕 냄새가 나는 타올로 소년의 몸을 감싸며 안아 일으킨다. 엘론드는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길갈라드의 셔츠를 손으로 힘주어 잡았다가 맥없이 손을 놓는다. 「감기 걸려」아이는 이번에는 대답 대신 목덜미를 끌어안아온다. 새처럼 가벼운 무게가 몸을 덮쳐와 길갈라드는 한참동안 말없이 아이의 무게를 지탱했다. 발치에서 펼쳐져 있던 책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길갈라드는 아이의 등을 안아들고 걸음을 옮긴다. 

 「돌아가자.」

 새순처럼 여린 입술이 뺨 위에 물 자국을 만든다. 길갈라드는 발걸음을 멈춘다.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어깨 위에 물기가 서린 얼굴을 애틋하게 묻어온다. 고장난 것처럼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는 길갈라드를 아이들의 눈이 좇아 붙는다. 고양이처럼 둥글게 말아올린 등, 팔 안에서 가볍게 움틀거리는 무게. 엘론드의 머리칼이 길갈라드의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묵직하게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욕망은 원초적인 신앙처럼 혈관을 구석구석 휩쓸고 지나간다. 

 새처럼 가벼운 몸이 끌어내는 온화한 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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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샬롯 마글 이야기로 넘어가면 될듯...와 어제 밤에 신나게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