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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이제는

merone 2014. 3. 17. 23:54




 산책을 가야지. 그는 돌연히 긴 회랑을 넘어와 장서관의 계단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선다. 정무를 마친 푸른 옷을 입은 채다. 엘론드는 계단 위에 앉아있다 마중을 나온 길갈라드를 보며 손을 뻗었다. 산책을 가야지. 길갈라드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회랑의 긴 아치를 따라 메아리처럼 넘실거리고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린돈의 언어는 오래된 요정의 주문과 같다. 엘론드는 그의 손을 잡고 느리게 언덕을 따라 내려간다. 린돈에 피는 황금 같은 꽃들이 작은 발에 채이는 동안 서녘으로 느리게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바다가 보일 때까지 느리게 언덕을 내려가 짙푸른 옷에 풀물이 들도록 앉아 엘론드를 안는다. 엘론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숨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숨이 차오기 시작하면 다시 입술을 열어 큰 숨을 내어 쉬고 다시 숨을 멈춘다. 그의 숨소리는 공기의 소리처럼, 여름의 고요한 더운 바람처럼 들고 난다. 그는 긴 소매가 풀물에, 풀꽃에 스쳐 물이 들도록 너른 품을 한껏 내어주고 이야기한다. 요정의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서 엘론드는 어렴풋한 별들의 이야기를, 에아렌딜의 이야기와, 서녘으로 향하는 바다의 이야기와 조선공의 이야기를 듣는다. 엘론드는 길게 숨을 멈춘다. 이번에는, 숨이 차오르지 않는다. 그는 섬세하지 못한 손끝으로 풀꽃을 뜯어 줄기를 엮기 시작한다. 창을 쥐는 손이 여린 손에 닿으면 거친 굳은살에 여린 살이 발갛게 쓸리기도 수차례였다. 엘론드는 그가 끼워주는 어설픈 풀꽃 반지를 손에 끼우고 그의 가슴 위로 머리를 기댄다. 숨도 쉬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품은 넓고 평온하다. 가위라도 눌린 듯 갑갑하게 메인 성대로 엘론드는 가까스로 가느다란 자장가를 부른다. 놀도르의 자장가구나. 엘론드는 새처럼 놀라 그를 돌아본다. 지는 햇살에 빛나는 얼굴은 평온하고 희미하다. 엘론드는 숨을 헐떡인다. 길갈라드의 손이 가만히 가슴을 누른다. 길고 어두운 밤길을 헤메이던 이들의 자장가를 들어도 길갈라드의 얼굴은 여전히 지는 햇살에 비쳐 흐리다. 엘론드는 오랫동안 그가 잇는 말을 기다린다. 눈을 깜박이면 시간이 반토막이 난 듯 길갈라드는 웃는다. 그 분은 뱃노래 밖에 모르던 분이란다 페레델. 누가요? 소리가 되지 않는 말로 물으면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누가요? 그의 얼굴은 여전히 햇살에 비쳐 희미한 형체처럼 보인다. 페레델. 부르는 소리에 다시 돌아보면 길갈라드는 이제 흰 모퉁이를 돌아 아치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다. 쪽빛 의복을 걸치고 흰 자수로 별을 박은 금빛 요대. 장신의 왕. 엘론드는 침상의 머리에 기댄 몸을 일으켜 손에 든 책을 내려놓는다. 일어나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따듯하고 단호하다. 왕의 목소리는 서슬퍼렇게 날이 서지 않고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끔 했다. 그는 아치 아래에서 침상까지 성큼 한걸음에 걸어와 침상 끝에 앉는다. 너른너른 퍼진 의복이 홑겹의 이불을 덮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는 손을 뻗어 길게 자란 발목을 붙잡는다. 봄꽃이 예쁘게 피었더구나. 그의 옷에서는 가을처럼 서늘한 바람의 내음이 난다. 산책을 가야지, 아가. 느리게 목이 메여온다. 

 언제쯤 일어날 셈이냐. 서늘한 손이 머리를 짚는다. 엘론드는 눈을 감는다. 그의 음성에 머리가 혼곤하다. 마치 의식이라도 잃었던 양 혼미하다. 엘론드는 그의 등 뒤로 팔을 견고하게 가다듬는다. 느리게 차오르는 울음소리를 겨우 삼켜내면 그의 목소리에는 따듯한 웃음소리가 섞인다. 언제쯤 나을 셈이냐 페레델. 그는 연기처럼 빠져나가 견고하게 고쳐 안은 두 팔은 둥근 흔적처럼 남는다. 

 이제 그만 아플 때도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긴 회랑을 따라 들리던 메아리처럼 흘러든다. 그는 이제 저 회랑의 끝에, 저 회랑의 문 너머에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그만 아플 때도 되었다, 페레델. 가까스로 차오르는 울음을 삼켰는데도 감은 눈커풀이 뜨거워진다. 눈을 뜨면, 이제 눈을 뜨면 그의 목소리도 사라질 것을 어렴풋이 안다. 페레델. 조금만 더. 페레델. 제발. 


 

 “엘론드.”

 엘론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밤에 어울리지 않는다. 뜨지 못한 눈으로도 그가 린돈에 남은 마지막 황금색 들처럼 웃는 것이 선하다.

 “핀웨 가의 자장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당신뿐일 겁니다.”

 “가세요.”

 지금은. 덧붙이지 않아도 글로르핀델은 가야할 때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눈꺼풀에 남은 잔상이라도 더듬으려는 애처로운 후희를 그는 웃음기 어린 한마디로 깨트려놓는다. 햇살처럼 따스하게, 요정의 목울대를 울려 퍼지는 소리는 먼 회랑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한 겹 꿈 안으로 밀어 넣는다. 페레델. 산책을 가야지 아가. 저 먼 회랑 끝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가물가물 사그라든다. 

 “좀 더 눈을 붙이는 게 좋겠네요.”

 엘론드는 그의 말에 몸을 일으켜 침상의 머리에 기대어 앉는다. 글로르핀델은 가만히 웃음만 지었다. 그 웃음에 섞인 연민을 헤아리는데도 이제는 지쳐 손이 얼굴을 덮는다. 


 

 산책을 가야지, 아가. 산책을…. 이제는 당신을 보면 아, 꿈이로구나. 산책을 가야지. 희미하게 빛나는 마치 흐려진 그림 같은 얼굴을 하고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꺼내는지 당신의 모습은 여전히 쉽게 그려진다. 오후의 정무를 마치고 장서관 앞까지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달려오던 옷이 어떤 쪽빛이었는지, 옷깃을 여민 요대에 박힌 흰 별은 몇이나 되었는지도 여전히 셀 수 있었다. 장신의 몸을 뒤덮은 새벽 동틀녘 같던 옷들. 걸음을 옮기던 발이 어떻게 긴 옷자락 끝을 들어올렸는지, 그 묵직하고 소리 없는 발걸음이 어떻게 새벽 공기를 울리며 침상으로 스며들었는지 조차도 생생하다. 점막 안을 아프게 갈퀴고 지나가는 그 봄날 린돈에 피던 황금같은 꽃향기. 세월에 바라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키면 어렴풋한 감정만 남는 것이 꿈인 줄로만 알았는데. 꿈에서도 꿈이로구나. 목이 메이고 나면 그 뒤에는 꿈에서조차 이제는 그만 아플 때가 되질 않았느냐 다독여, 겨우 추슬러 감춘 것들을 열고 등을 떠미는 손길이 야속해서 메인 목이 아프다. 

 언덕빼기 아래로 여름마다 강이 범람하면 이듬해에는 풍족한 옥토로 다시금 변하던 린돈의 땅들. 평야들. 언덕과 실개울들. 당신의 남색 옷자락 끝에서 누웠다 일어나던 그 여리고 따사롭던 풀잎들. 그 시절에는 놀랍지 않았던 당신이 일궈낸 풍요로움의 흔적들. 그 가운데에서 금방이라도 당신이 임라드리스의 기둥 사이를 넘어 들이닥칠 것만 같은 꿈을 눈을 뜨고는 꾼다. 전쟁의 상처를 짊어진 채로 젊은 청년에서 왕으로 자란 당신 걸음에 소리가 있을 리 없어 문득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는 바람소리에도 임라드리스의 흰 기둥 사이를 돌아본다. 발걸음에 소리라도 있었다면 문득, 문득 누구도 없는 회랑을 돌아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흰 기둥사이로 푸른 옷자락을 찾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어서. 

 꿈도 꾸지 않는 긴 잠에 들면 그리움도 사라지지 않을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녘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으면 오래 전에 떠난 당신이 아름다운 항구에 나와 맞아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헤아린다. 해변을 따라 요정들이 뿌려놓은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있다는 모래사장을 맨발로 내딛으면 몸이 젖어들다 바다의 물처럼 변할 때까지 그 모래에 박혀 당신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바다의 물처럼 변할 때까지.  

 꿈에서 당신을 볼 때마다 이제는 꿈이구나 참아온 눈물들을 쏟아내면 지금도 나는 바다처럼.

 

 산책을 가야지, 아가. 이제는 당신을 보면 아, 꿈이로구나. 어른어른 물에 잠겨.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황인숙,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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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합작에 공개되었던 글입니다 :) 

본래 생각했던 bgm은 라나 델 레이의 Young and Beautiful 이었는데, 글 보고 떠오른다고 해주신 노래가 더 어울려서 넣었어요: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