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란엘 뱀파이어AU
물기를 머금은 거리는 가스등불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퀴퀴한 가죽냄새가 올라올 정도로 잔뜩 젖어 내피까지 물컹해진 구두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물에 비친 등불이 주홍색으로 흔들렸다. 거리는 이른 잠에 빠져있었다. 옆으로 좁고 위로 층을 더한 벽돌건물들은 모두 커튼을 닫고 추운 겨울의 밤을 일지감치 잠의 뒷켠으로 보낸다. 어깨를 나란히 한 건물 굴뚝 위로 물기에 젖은 연기만 짧은 입김처럼 새어나왔다. 남자는 검은 우산을 접고 코트의 어깨에 맺힌 빗방울을 턴다. 무릎을 한차례 크게 들어 올려야 내딛을 수 있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문을 두드리자 문 위의 작은 아치형 창문 너머로 불이 들었다. 필라멘트가 거의 다 타들어가 음울한 주홍색으로 빛나는 낡은 전깃불이 깜박인다. 곧 전구를 갈아주어야 할 테지만 그 전에 이 집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는 머리끝까지 온통 붉은 담요로 몸을 뒤덮은 채 나와 문을 열었다. 곳곳이 구겨진 셔츠 위로 아무렇게나 헝클어지고 쳐진 금발과 차가운 나무 바닥을 딛고 있는 창백하고 큰 발. 그는 좀 전에 그가 내려왔을 계단의 난간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남자를 바라본다. 몸을 기대고 있던 검은 우산살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둥글게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자 그의 오른발이 뒤로 물러났다.
“늦었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건조하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담요를 추켜올리던 손으로 목덜미를 누르고 얕은 헛기침을 뱉는다.
“먹을 만한 걸 좀 가져오느라.”
“그 놈의 쥐새끼는 집 안에도 충분해, 엘론드.”
그의 걸음은 폭이 크다. 스란두일은 신경질 적으로 엘론드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아 벽에 검은 우산을 기대어 놓는다. 엘론드는 그의 행동에도 희미하게 웃으며 신문지로 여러 번 감싸 동여맨 꾸러미를 내밀었다. 빗물에 얼룩져 푹 젖은 꾸러미를 받아들자 스란두일의 손 안에서 꾸러미가 팔딱 뛴다.
“사람이 이렇게 작을 리는 없을테고.”
꾸러미가 힘없이 또 팔딱 뛰었다.
“토끼야. 구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어.”
엘론드는 비에 젖은 코트를 벗는다. 주홍색의 타 들어간 필라멘트 아래서 그의 입술은 희게 질린 것처럼 보인다.
“모처럼의 비오는 날인데 시체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제발 그냥 받아. 앞으로 보름은 또 쥐새끼로 연명해야 할 테니까.”
엘론드의 손이 스란두일의 어깨 위에 잠시 머무른다. 그의 젖은 손이 스란두일이 아무렇게나 뒤집어쓴 담요 모퉁이를 깊은 색으로 적셨다.
비가 오는 날 만큼 먹이를 구하기에 적당한 날도 없었다. 싸구려 비옷으로 감싼 경찰들은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일찌감치 골목사이로 사라지고 밤마다 들끓던 사창가도 장사를 접는 날이었다. 피의 냄새, 사체의 갓 부패하기 시작하는 싱싱한 살의 냄새도 빗물에 씻겨나가는 날이었다. 운이 좋으면 불어난 강물 위로 신선한 사체 하나쯤이 떠오르기도 하는 몫 좋은 날인데 그는 지금 모처럼의 포식을 놓쳐버렸다고 순순히 터놓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꾸러미의 머리가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손을 얹는다. 손바닥 아래에서 가늘게 오르내리던 숨이 잠시 끊어진다. 다시 움직인다.
“멍청하긴. 사람 목 좀 뜯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고상한 척을 하느냔 말야.”
스란두일은 그의 발아래에서 푹 젖어버린 현관 깔개를 흰 발로 걷어찬다.
“피곤하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한다. 스란두일이 금방이라도 쏟아낼 불평들을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투였다.
“이만한 토끼 한 마리로 두 사람 배가 찰 것 같은가?”
스란두일은 꾸러미 아래에서 종이가 젖은 소리로 퍼덕이는 소리를 듣는다. 머리 아래로 손가락 두마디를 더듬자 짐승의 모가지가 손아귀에 꽉 찼다.
“자네 혼자 마셔. 난 됐으니까.”
“굶어 죽기라도 하려고?”
스란두일의 말에 엘론드는 웃는다.
“제발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겠군.”
푹 젖은 웃음이었다.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엘론드는 스란두일에게서 등을 돌려 현관을 꽉 채운 계단을 밟아 오른다. 그의 뒷모습은 물에 젖은 토끼 따위나 주우러 다녔던 사람답지 않게 단정하다. 그의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 밑에서 얇게 접힌 깃과 그 밑으로 가느다란 선으로 내려오는 박음새들. 엘론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팔에 걸린 코트를 고쳐 맨 다음 자신이 올라온 계단에 남은 구두모양의 물자욱을 바라보고 구두를 벗었다. 그는 검지와 중지로 구두를 가지런히 모아 손에 든다. 이제는 물에 젖은 그의 발을 감싼 얇은 천에서 물이 배어나온다. 스란두일은 머리 끝까지 뒤덮고 있던 담요를 뒤로 젖힌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계단 위로 사라진다.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운 계단을 오르면 그 위에는 작은 거실이 있었다. 낡은 벽은 벽지를 바른지 적어도 이십여년은 지난 것처럼 붉은 것들이 죄 시간에 바래 갈색으로 변한, 드문드문 검은 페이즐리 문양만이 얼룩처럼 남은 거실. 스란두일은 열린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느리고 끌리는 발걸음으로 카페트 위를 걸어다니는 엘론드를 바라본다. 그는 비에 젖은 코트를 걸어두고 양말을 벗어 젖은 장작이 타는 난롯가에 널어둔 뒤에 낡고 붉은 소파에 완전히 몸을 파묻는다. 그가 소파에 앉아 아래로 푹 꺼져가는 동안 검은 광목천 같은 머리칼이 등받이를 문질렀다.
“엘론드.”
손바닥 위의 꾸러미는 스란두일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계단 위에 점점이 물자욱을 냈다. 물자욱을 내던 것이 거실의 문가에 와서는 발등 위로 묽어진 피 같은 것을 떨어트린다. 손 안에서 헐떡이던 숨이 멈춘 것도 같다. 스란두일은 엘론드를 불렀다.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알파벳을 전부 하나의 음절로 만들어 부르듯이 정확한 발음으로. 아마도 스란두일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그는 오십년 전에도, 그리고 아마 백년이나 이백년 전에도 또는 십수세기 전에도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느리게 형태를 바꾸어 입는 언어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과 함께 /예전의 언어를 입은 채다. 언어는 세월에 닳지 않았는데 혀끝을 맴도는 공기가 뭉툭해졌다.
“조금이라도 마시는 게 어때.”
스란두일은 토끼의 몸을 감싼 신문지를 한 겹씩 벗겼다. 짐승에 몸에 철퍽하게 달라붙은 종이는 하나의 작은 지면기사가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 끝에서 섬유처럼 뭉그러졌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타는 장작과 난롯가 그 어디쯤에 있다. 손이 이번에는 뭉그러지는 종잇장을 단번에 뜯어낸다. 젖은 짐승의 털이 얇은 살점과 함께 손톱 아래에 박혔다. 뜯겨나간 종잇장 아래로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내는 짐승은 갈색 들토끼였다.
스란두일은 기댄 어깨를 추슬러 선다. 핏물이 떨어진 발등은 희고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마른 발등 위로 단단하고 굵은 뼈가 도드라진다.
“마셔.”
내민 손은 갈색의 짐승털로 지저분하다. 짐승의 몸통은 드문드문 살점이 패였다.
“나는 됐어. 자네나 마시게.”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니잖아.”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닌데 뭐 어떤가.”
그의 검은 머리칼이 골이 패인 소파의 등받이 위에서 이리저리 뭉개진다. 엘론드는 여전히 질린 입술을 하고 눈꺼풀과 눈동자만 들어 스란두일을 올려본다. 엘론드는 그의 오래된 연인의, 아니 어쩌면 연인은 아닐 남자의 입술에 스산한 웃음이 걸리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다. 얕은 웃음이 짐승의 살점처럼 가느다란 입술의 주름 곳곳에 저며있다.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자네가 원했잖아.”
“날 사랑하니 제발 같이 있게 해달라고 한 건 자네였어.”
스란두일은 오른 무릎을 바닥에 대고 꿇어앉는다. 그의 무릎위에 살점이 떨어져나간 작은 짐승을 얹고 짐승의 털과 피와 살로 얼룩이 진 손가락으로 긴 금발을 쓸어 넘긴다.
“더 말렸어야지. 사랑스러운 엘론드. 죽은 쥐새끼 시체에 이빨이나 파묻고 사는 삶이어도 괜찮느냐고 물었어야지. 장작이 타는 난롯가에 기대어 앉아도 온기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삶이어도 괜찮느냐고 물었어야지.”
이렇게 추운 겨울인데 말이야. 엘론드. 가느다랗고 부석한 금발에 붉은 물이 든다. 그는 스란두일의 눈길을 피하는데 벅차 시선을 돌리다가 스란두일의 머리칼에 남은 붉은 자욱들을 보고 입을 틀어막는다.
“자네는,”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목소리가 새 나왔다.
“자네는 그렇게 하게.”
물에 젖은 장작이 타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헐떡이던 짐승의 숨소리도 멈춘지 오래였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오래전부터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자네는 그렇게 해.”
스란두일은 입을 틀어막은 엘론드의 손을 바라본다. 식물의 수관처럼 마른 손가락 마디마디 불거져 나온 뼈대와 낮은 온도에 벌겋게 번진 손등. 스란두일의 시선을 느낀 손이 남은 손등을 덮어 문지른다.
“내가? 누굴?”
옅은 회색 눈이 아주 짧게 스란두일의 눈동자에 머무른다.
“누구한테!”
스란두일은 그의 무릎 위에 올려진 짐승 채로 그의 다리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스산하고 아름다운 얼굴 아래에서 드러난 송곳니가 번쩍였다. 그는 스란두일의 표정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는 듯이 한껏 숨을 끌어올려 가슴을 부풀리면서 몸을 뒤로 젖힌다. 엘론드는 눈을 감고 목을 어깨에 파묻은 채로 고개를 완전히 튼다.
‘알잖아.’
그는 입술은 눅눅하게 젖어 열리지 않았고 그의 목은 뒤틀려 목울대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스란두일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따금 환청처럼 엘론드는 소리도 목소리도 아닌 것으로 대답한다.
스란두일의 몸 아래에서 들짐승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둥근 봉오리처럼 짐승의 내장을 감싼 갈비뼈들이 차례로 부러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부러진 뼈가 그것의 내장을 가르고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열린 구멍에서 핏물이 흘러나온다. 그의 바지위로 짐승의 피가 축축하게 젖어든다. 스란두일이 짐승의 몸 위에 싣은 무게를 덜어내자 그는 겨우 숨을 몰아 내쉬었다. 뒤로 젖혀져 한껏 부풀었던 그의 가슴이 가라앉는다.
“자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건 내가 자넬 사랑해서였지. 자네가 날 사랑해서가 아니었지.”
엘론드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몸에서 들짐승의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린다. 비좁은 틈새 사이를 갉아먹고 사는 쥐들이 짐승의 피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스란두일은 두 무릎을 모두 땅에 붙이고 엘론드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그가 놀라 파득 몸을 떤다. 푹 젖은 들짐승의 목덜미에 드러낸 이를 박으면 드러낸 송곳니가 가죽을 찢고 들어가는 파열음이 났다. 엘론드는 스란두일의 어깨위로 흘러내린 머리칼들을 손등으로 걷어내어 귀에 걸었다. 스란두일은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그는 스란두일의 버석한 머리칼 끝을 손가락에 끼워 느리게 문지르다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입술을 벌렸다. 짐승의 체온은 비에 씻겨내려가 완전히 차가워 진 줄로만 알았는데 피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도로 뛸 것처럼 따듯했다. 스란두일은 열린 입술 사이로 천천히 자신의 입안에 고여있던 피를 흘려넣었다. 머리칼을 쥐는 엘론드의 손을 잡았던 손이 그의 팔을 타고 올라가, 희고 마른 목을 더듬어 그의 뺨으로 옮겨간다. 열린 입술이 닫히지 못하도록 엄지 끝으로 입술 아래의 도톰한 살을 힘주어 눌러 내리면 길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뺨을 감싼다. 스란두일은 흘려 넣은 것들이 그의 선분홍색 목젖 뒤로 넘어가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힘줄이 도드라진 손을 떼어냈다.
“그래도 쥐보다는 낫군. 그렇지 엘론드?”
“자네 몫은?”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니잖아.”
입술에 고여있던 피가 막 흐르려는 찰나에 스란두일은 손등으로 제 입술을 훔쳤다. 도처에 쥐새끼가 널려있어도 싱싱한 네발짐승의 피만 못했다. 양도 적은데다가 거죽에서는 시궁창 냄새가 나는 쥐새끼의 털에 코를 박고 싶을 리가 없었다. 막 입에 피칠을 하니 목구멍 뒤에서 찌르는 듯한 갈증이 올라온다. 엘론드는 허리를 세우며 일어나던 스란두일의 팔목을 붙잡는다.
“왜.”
엘론드는 가늘게 떨리는 팔목을 더듬어 손바닥이 움푹 패이도록 갈등을 거머쥔 주먹을 손에 넣는다. 접힌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나가는 동안 힘겹게 돌아서려던 스란두일의 시선이 정수리에 꽂혀있는 것이 생생하다. 펼쳐진 스란두일의 손바닥에는 짐승의 털과 핏자국만 남았다. 그는 힘이 빠진 스란두일의 손바닥을 들어올려 자신의 왼 목덜미에 얹는다. 스란두일이 얼마간의 정적을 지키다 얕은 목소리로 웃었다. 마른 목덜미에는 여러 번이나 같은 자리에 흉터가 졌던 듯이 피부의 색이 붉게 변한 자국이 나란하다. 스란두일이 허리를 숙인다. 모처럼 그가 넘겨준 머리칼들이 쏟아졌다. 자네, 나한테 숨기는게 있지? 스란두일이 속삭인다. 그리고 허연 살결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뒤통수에 무게추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목이 꺾였다.
“해가 일찍 져서 다행이었어.”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작은 들짐승을 하나 잡았던 날 후로 엘론드는 제대로 밖을 나다닐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드물게 오래도록 비도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임에도 몸이 나아졌다는 핑계로 엘론드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근래에 일찌감치 해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어둑한 하늘 탓에 제대로 빛이 들지 않아 몇몇일은 낮에도 커튼을 열어놓기도 했다. 엘론드는 외투를 벗고 희미하게 비쳐드는 빛을 가려주던 모자를 벗는다. 그가 소매 끝의 커프스단추를 완전히 풀어내 난롯가 위에 올려둘 때까지도 스란두일은 말이 없었다.
“빈 손이라서 화가 났나, 자네?”
“내가 그따위 것으로 화내는 치졸한 놈이었나.”
“음.”
엘론드는 얄팍하게 웃었다. 글쎄.
“그렇게 보인다는 거군.”
“어떤 남자가 전해달라고 하던데.”
스란두일은 뜸을 들이다 팔짱을 풀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엘론드에게 내밀었다. 엘론드가 손을 뻗는 순간 스란두일은 편지의 모퉁이로 제 뺨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 거처를 아는 사람이 있나?”
“아니”
“알려주지도 않은 집 문을 두드려서 직접 편지를 전해줬는데도?”
“모르는 일이야.”
날카로운 모서리가 엘론드의 턱끝을 훑었다.
“자네가 훔쳐보는 그 남자더군. 응? 검은 머리에 눈이 잿..”
스란두일은 소리내어 하하 웃는다. 엘론드의 뺨이 얼어붙어있었다. 이름이 무어라고 했더라. 무어라고 전해달라고 했더라. 편지의 겉면은 깨끗한 흰색이다. 받는 이의 이름도, 쓰는 사람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다. 아마도 엘론드는 스란두일이 그의 눈길을 거기까지 쫓았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스란두일은 얼어붙은 엘론드를 바라보다 그의 얼굴 옆으로 손을 뻗어 창문을 가린 커튼을 들춰본다. 남자는 거리의 모퉁이 건물의 그림자 안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엘론드가 거리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편지를 전해주고는 사라진 듯 했던 남자는 엘론드의 모습이 창문에서 보일 때쯤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얼어붙은 걸 보니 아는 사람이야.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자네는 아나?”
엘론드는 그의 턱끝을 날카롭게 훑는 편지를 잡아챈다. 깨끗한 겉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편지를 뒤집었을 때 그는 봉되어있던 밀랍이 한차례 뜯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 숨길 일도 아니잖아.”
안 그런가? 자네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알아야지. 엘론드는 느린 손으로 봉이 뜯겨나간 편지지를 펼쳤다. 스란두일이 떨리는 엘론드의 손목을 받친다.
“그래서 그 자가 말하는 대로 같이 떠나려고? 으슥한 창문 뒤에 숨어서 바라만 보던 자네가?”
스란두일은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들어 편지를 읽는 엘론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어붙은 뺨이 잘게 떨린다. 그는 펼쳐진 편지를 다시 접는다. 원래 접혀있던 모양대로 천천히 접어 닫히지 않는 도톰한 밀랍을 엄지로 더듬었다.
“그 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길-”
“길 갈라드.”
“잘 아는군. 단박에 나올 정도야. 입 속에서 수천 번은 굴려봤나?”
“스란두일!”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쥐고있던 편지가 손끝에서 스윽 빠져나간다. 엘론드가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돌아보았을 때 스란두일은 이미 타는 난롯가에 편지를 던져넣고 있었다. 탁, 탁. 하고 종이 끝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멈춘다.
“자네는 못 가.”
“날 이렇게 만든 건 자네야,”
엘론드는 한참동안 허망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스란두일의 팔은 희고 차가운 뱀처럼 엘론드의 목과 등을 감싼다. 스란두일의 팔은 뱀처럼 차갑고 뱀의 비늘처럼 단단하다. 빈틈없이 끌어안기면 물에 잠긴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개같군. 알아?”
스란두일은 엘론드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손톱 아래의 피부는 푸르스름하게 질린 색이었다. 한겨울인데도 말을 내뱉는 입술 끝에서는 입김이 흐르지 않는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자네는 외롭고 무지했지. 긴 시간을 혼자 보내기에는 무서워서 날 선택했어. 그자들의 밀회도, 그자들이 어떻게 사냥하는지도 몰랐지. 자네한테는 나 밖에 없었어. 자네만큼 무지하고 자네에게 의지하는 나 밖에는.”
“그런데, 저. 창 밖에.”
비늘처럼 단단한 팔 안에서 그는 창을 향해 돌아선다. 완전히 어두워진 창 밖으로 흐린 가스등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엘론드의 어깨를 쥐었다. 엘론드의 마른 등에 가슴팍이 닿는다. 스란두일의 입술이 목덜미 뒤에 숨을 끼치고 다가와 귓가에 말했다.
“자네가 오랫동안 바란 그 사람이 자네와, 나와 같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늘 궁금했지. 자네가 비오는 거리를, 해 진 거리를 걸으면서 뭘 보고 다니는지. 자네와 다르게 나는 여전히 약한 볕 아래에도 나갈 수가 없는 몸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자네의 시선을 쫓기 시작한 거야.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지. 자네는 쉽게 어디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유달리 자네가 오래 지켜보는 때가 있어. 이따금 동쪽의 체링크로스가를 따라서 광장으로 나서는 남자. 이름이, 그래 길 갈라드라고 했나. 자네가 그 사람을 꽤 오래 바라보더군.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편지를 읽자하니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자가 먼저 접근했을 수도 있겠지. 동족의 냄새 같은 걸 맡고 말이야. 자네가 그 자를 어떻게 알았는 지는 모르지만.
근래에 그 자와 만난 적이 있지? 근래가 아닌가? 조금 더 되었나?
목줄기 뒤부터 소름이 얼음처럼 돋아나는 것 같았다.
요즘 날이 흐렸지. 구름이 많이 낀 날씨더군. 그랬지, 엘론드? 그래서 커튼을 좀 열어놓았지.
“최근에는 자네와 함께 산책을 좀 했는데. 몰랐나?”
자네가 걷는 길을 따라 걷는데 내가 이런 곳에 살았나 싶더군.
엘론드의 눈길이 자신을 창틀과 몸 사이에 가두어 놓은 흰 발등 위로 떨어진다. 푸르스름하게 비치는 혈관에는 아마 피를 먹고 생겨나는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창틀을 붙잡은 손이 파르라하게 떨린다. 스란두일이 목청껏 웃는 소리에 엘론드는 얕은 숨을 들이킨다.
“그 남자와 만나는 건 즐거웠나? 날 버릴 준비가 충분히 되었느냔 말이야.”
뱀같은 손. 뱀처럼 느리게 몸을 감은 팔이 허리를 붙들고 갈비뼈 아래의 온통 빈 물컹한 내장을 잡아당겨 안았다. 나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눈치더군. 그 남자. 응? 내장이 아직 거기에 있던가. 오랫동안 수세기동안 음식을 담지 않았던 내장들이 혹여 썩어문드러졌기 때문에 스란두일의 팔 안에서 빈 몸통이 이그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엘론드는 눈을 감는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숨에 색이 없었다. 창가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들의 손이 닿는 곳도 입김이 닿는 곳도 온도로 누그러드는 것은 없었다.
“내가 말했지 않나.”
“난 아무데도 못 간다고.”
“그래.”
“자넬 그렇게 만들고는 어디에도 못 간다고도 했지.”
“영리하군.”
몸을 감싼 팔등,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흰 팔뚝 위에 가늘게 떠는 손을 얹는다. 어깨위로 내려앉는 스란두일의 턱을 빗겨 두 팔을 젖히자 두 팔은 벗은 허물처럼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묵은 허물처럼.
“자네는 어디까지 자네를 잃을 셈인가.”
“네가 날 사랑할 때까지.”
그는 창 밖에서 익숙한 잿빛 눈을 본다. 커튼을 닫는다.
“떠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는 스란두일의 품을 헤치고 나와 소파에 앉는다. 천은 군데군데 떨어져나가고 얇고 낡은 솜들이 난롯불 앞에서 노랗게 익었다. 따듯하게 지핀 장작불이 식은 손 끝을 덥히지 못한지도 오래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난롯가의 허름한 소파에 앉는다. 수세기 동안 인간으로 남은 습관처럼. 마치 연기가 피는 굴뚝만이 사람들의 집 사이에 자리 잡은 그 집을 사람의 집처럼 만들었던 것처럼.
스란두일은 창을 등지고 선다. 남자가, 길 갈라드라고 불리는 남자가 엘론드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오래 전부터 체링크로스가를 따라 광장으로 나서는 남자를, 깃이 얇은 신사용 코트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엘론드도 남자가 그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알지 못했다. 상냥한 잿빛 눈. 신사용 코트에 어울리는 곧게 선 등. 처음으로 길갈라드를 거리 위에서 마주쳤을 때, 남자는 숙녀용 양산이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길고 아름다운 하늘색 상자를 들고 빈손으로 가게에 들어서는 엘론드를 위해 문을 잡고 있었다. 단순히 그 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랬지.”
그는 여러 번 상처가 아물었던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수차례 상처가 아물었던 것처럼 수차례 떠날 생각을 했다. 스란두일이 나서지 못하는 날에. 우묵하게 패인 거리에 쏟아진 햇빛이 여전히 발치에서 흔들리는 저녁을 틈타서 여러 차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은 없었다.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간다는 거짓말에도 스란두일은 보란 듯이 속아넘어갈 것이었으나, 거짓말을 해본적도 그를 속이려고 든 적도 없었다. 떠남은 타는 난롯가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팔걸이에 흩으며 누워있는 그림자 앞에서 녹아있었다. 마치 그들에게 시계가 없듯이 떠난다는 말도 홀연히 사라졌다.
“자네가 자네를 잃어버린 것처럼.”
얇은 셔츠가 창틀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스란두일이 창가에 기대어 서있던 몸을 세우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자네가 자네를 잃어버린 것처럼. 어디에 흘리고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란두일이 그를 잃어버린 것처럼 엘론드도 아마 그의 뱀 같은 팔에 휩쓸려서 어딘가에 자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끝도. 시작을 잃어버린 것처럼 끝도 어딘가에 녹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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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slight Anthem (가스등 송가) 제목은 모님이 붙여주심. 책으로 내게 되면 쓰고 싶었던 디테일을 좀 더하고 스란두일과 엘론드가 처음 만난 장면, 길갈라드가 엘론드 정체를 파헤치는 부분이 추가된 얇은 중철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책으로 낼지는 잘 모르겠어서 (어차피 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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