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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무제

from archive/Tolkien 2014. 3. 31. 20:09


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엘론드. 



1.

 너는 또래보다 반 뼘이나 작았지. 너보다 큰 아이들도 나만한 아이들도 많았지만 너만큼 반 뼘이나 작은 아이는 없었다. 어깨까지 오는 짧은 단발을 늘어트리고 너는 또래 사이에 끼지 못하는 채로 성의 그늘에서 책을 읽고는 했다. 움츠러든 어깨, 겁에 질린듯한 표정. 너에 대한 소문은 온 왕국에 파다했다. 페아노리안 형제에게 자란 아이들. 네가 어떤 사람들의 곁에서 어떤 고달픈 밤과 어떤 고달픈 길을 떠돌아다녔는지에 관심이 있는 요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폐허가 된 왕국이 가슴속에 있었고 요정의 노래는 큰 파도처럼 작은 아이들에게도 흘러들었다. 네 입술 사이로 이제는 쓰지 않게 된 퀘냐의 흔적들이 굴러떨어질 때마다 아이들은 너에게서 걸음을 물렸다. 얼마간은 그 영문도 모를 적대감이 아픈 듯 한껏 어깨를 움츠리던 네가 어느 날 입술을 꾹 깨물고 괜찮다는 듯 책을 쥔 작은 주먹에 힘을 주었을 때, 어린마음에 문득 그것이 보기 싫다고 생각했지. 반 뼘이나 작은 네가 한껏 상처받아 울상이 된 표정으로 작은 입술을 꾹 다문 표정이, 그리고는 아이들이 뛰놀던 뜰에 모습을 비추지 않게 된 것이. 

 나는 종종 네가 좋아하던 그늘을 찾아갔다. 너는 책장을 넘기다 문득 서늘하게 지는 그늘에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지. 너와 두 아이는 더 앉을 수 있을 법한 거리를 벌리고 계단의 끝과 끝에 앉아서 이야기를 건네면 너는 몹시도 놀라고도 귀찮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네 아다 이름은 뭐야? 나나는? 말을 걸때마다 파드득 떠는 어깨가 좋았다. 입술을 꾹 여미어 닫은 표정 대신 얇고 고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입술을 달싹이면 나는 웃음을 겨우 걸어잠그고 뻔뻔한 표정으로 너를 돌아봤다. 턱을 괴고 네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 너는 대화에 익숙치 않은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애써, 빠른 대답을 쏟아낸다. 

 이따금 너는 내 이야기에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리고 대답들이 생각나지 않는 다는 것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글썽였다. 네게서 누군가가 빼앗아버린 것에 불과한 것인데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미안하기라도 한 양. 그리고는 책에 눈물방울이 떨어질라 허겁지겁 책을 덮고 등 뒤로 숨기면서 내가 나빴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던 것이다. 그 때 네가 울음이라도 터트렸다면 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품으로 작은 너를 안았을텐데, 너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부쩍 자랐지. 내가 너에게서 떨어져 앉는 거리도 점점 줄었다. 너는 늘 손에 책을 들고 있었는데, 그때가 되도록 장서관 안에 네가 읽지 못한 책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내게 배움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었고 나는 네 곁에 앉아 따스한 볕에 낮잠을 청했다. 그 작은 계단 위에 몸을 뉘이기 쉽지 않을 만큼 커졌을 때에는 너는 적당한 나무 아래에 새로운 터를 잡았지. 나를 위한 일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간밤의 아버지의 꾸짖음에 피곤에 지쳐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지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너는 다 읽은 책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두고 가만히 거기에 앉아있었다. 이따금 너는 자라난 들풀을 뜯어 내 머리위에 올려두고, 소매의 단추 위에 줄기를 둥글게 말아 꽃을 꽂아두고는 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서슴없이 자라던 너는 아름다웠지. 여전히 너는 나보다 반 뼘이나 작았다. 네 손에 네 마음만큼 따스한 치유자의 힘이 깃든 것을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네 다리 위에 머리를 올려두고 네 손을 그 위에 얹으면 단 낮잠에 악몽이 도사리는 일은 없었다. 너는 여문 손놀림으로 등허리를 덮는 내 금발을 엮어 꽃을 꽂아두고는 했다. 일어날 때마다 내가 미간을 좁히며 쑥스러워할 것을 알면서도. 너는 나를 앉혀두고 겨우겨우 터지는 웃음을 죽인 얕은 목소리로 웃으며 차근차근 네가 땋아놓은 머리를 풀어주었다. 

 좀 더 오랫동안 그런 너를 볼 수 있을 줄로만 알았지.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분의 말에 묻어있던 그 분노들, 혐오들과 통탄들에서 내가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했다. 좀 더 오랫동안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빗처럼 내 머리를 빗어 내리던, 곤히 잠든 내 곁에 얼굴을 마주 보고 누워선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던 너를 좀 더 아껴서 눈꺼풀 뒤에 박아두었어야 했는데. 



2.

 우리가 헤어져도, 우리가 겪은 그 수많은 일보다 아프지는 않을 거야.


 너는 가만히 흰 나무의자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그 드넓던 린돈은 와해되어 저물어가고 너의 새로운 왕국은 고요함과 너를 닮은 흰 빛으로 계곡과 계곡사이를 빼곡히 메꾸고 있었지. 또래보다 반 뼘이나 작던 어린 시절의 너는 나긋한 몸가짐의 청년이 되었다가 이제는 임라드리스를 너의 팔 안에 가득 에워싸고 이별을 입에 담았다. 너는 신중하고 지혜로웠지만 언제나 나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내게 네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겪은 그 모든 일만큼, 어쩌면 그 모든 일보다도 아플 것이었는데. 

 너는 알고 있었을까, 몰랐던걸까. 아니면 알고도 외면해야했을까.

 네 표정은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의 것인 양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가느다란 너의 턱선을 눈으로 훑으면 내 시선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의 시선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너는 결심이 선 듯 한 얼굴로 가만히 내 손끝을 만졌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이나 내 손끝을 더듬는 너를 그대로 두었다. 너의 손끝에서는 여전히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졌음으로. 

 나는 네게 그런 결심을 서게 한 것들을 얇은 강바닥 아래로 비쳐 보이는 조약돌처럼 내려다볼 수 있다. 우리는 많이 잃었고, 아마도 너는 더는 잃지 않을 무언가를 견고히 쌓아올리고 싶었겠지. 너의 작은 왕국이 느리게 그러나 확연하게 봄의 녹음처럼 번져나가는 동안 너는 그 사실을 점점 더 깊이 느끼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네 곁에 있을 수 없는 내가 아니라 너를 더 견고한 성채로, 너를 임라드리스의 영주로 만들어줄 부드러운 한 겹의 웃옷을 바라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너는 내가 정말로 네 성혼식에 참석하리라고 여기고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것조차 보내지 못할 사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혹은 네게 재차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네가 성혼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 나는 갈리온이 놀랄만큼 웃었다. 너는 그렇게 너를 임라드리스의 영주로 만들어줄 부드러운 한 꺼풀의 웃옷을, 비단처럼 아름다운 무게중심을 찾았다는 것을 내게 알렸다. 

 내게 그저 알리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마간은 했다.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 먼거리에서 늘상 그런 것들을 공유하던 사이였음으로. 나는 너의 영지에 몇 그루나 되는 꽃나무가 있는지 얼마나 넓은 들판이 있으며 네 성채에 몇 개나 되는 방들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내게 한 겹 우아하게 너를 덮어줄 비단이불 같은 무게중심을 찾았다는 편지를 보냈다. 다를 바는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어느 해에는 네 앞뜰의 어떤 꽃이 피지 않았는지, 네 잠자리가 사납지는 않은지 알고 지냈다. 그 뿐이었다. 나는 본래 그랬듯 내게 남은 그 거대하고 울창한 숲을 뒤로하고 언제든 네게 달려갈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너 또한 그랬다. 너는 너 자체로 견고해져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그늘처럼 부드럽고 온유하던 너를 견고히 다져놓은 것은 그 간의 세월과 점차 자라나는 너의 아이들과 너의 곁에 있던 이였겠지. 나는 그저 너의 글씨에서 너의 목소리로 별의 이름을 딴 세 아이의 이름을 들었다. 



3.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너의 말투는 그간 많이도 변했었는지, 너는 내게 정말로 놀란 듯이 그렇게 물었다. 네가 여기에는 어떻게. 그렇게 묻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너는 어른스러운 말투로, 이제는 여리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청년의 말투와 목소리가 남아있지 않은 현자의 말투로 내게 물었다. 떠난다기에.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너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떠난다기에. 재차 확인하듯 또렷하게 묻는 말에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럴 때도 됐다고 생각했지.

 떠날 때가?

 네가 또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말했을 때 너의 표정을 너는 알고 있을까. 너는 상처받기라도 한 듯이 나를 돌아봤다. 그말이 정말 네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까. 눈썹이 일그러트리면서 너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 짧은 찰나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던 예전의 너를 찾아내고 나는 미소를 띤다. 

 너는 이미 내게서 한 번 떠난 사람이었다. 결심이 굳은 얼굴을 한 주제에 떨리는 손끝으로 내 손마디를 차분히 더듬으며 너는 내게 이별을 이야기했다. 나는 한 번 네가 떠나감을 받아들였다. 상처받기라도 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너를 바라보다 나는 손을 뻗어 네 뺨을 더듬는다. 

 그때의 네가 그랬듯 결심은 섰으나 떨리는 손으로.


 농담이야. 소문으로 들었지.

 자네는.


 네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자네는.

 남을걸세. 

 

 남을거야. 네가 다시 묻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말을 더한다. 


 어째서.

 늘 자네만 날 애태워서는 내가 억울하니까.

 

 너는 정말로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이내 조용히 달싹이던 입술을 멈췄다. 그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도 내가 보고싶어하지 않던 입술을 안쓰럽게 매어 문 표정으로. 너는 그 순간에 네가 내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헤아리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말했던 것과 내가 받아들인 것이 같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차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나의 헤어짐은 우리가 겪은 그 수많은 일보다 아팠다는 것을. 내 상처를 헤아리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된 순간 더할나위 없이 상처받았겠지. 괜찮다. 나는 네가 고작 그 정도로 쓰러지거나 날아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별을 겪고 다시 상처를 입으며 여기까지 왔으니까. 


 기다려봐 내가 언제쯤 돌아갈는지.


 너는 말없이 떨리던 내 손을 쥐었다가 곧, 그 어디에라도 그 밤에도 핀 꽃이 거기에 있다면 예전처럼 내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아줄 것만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잘 가게. 적어도 내가 여기에 남아있는 동안은 네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는 살피고 있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나는 흔한 포옹도 입맞춤도 없이 너를 배웅했다. 깊은 밤에. 네가 떠나는 회색항구에서도, 빛나는 너의 환송식에서도 아닌. 마치 내가 아버지를 따라 린돈에서 떠나던 날의 밤처럼. 너는 한참이나 말없이 내 손을 쥐고 손끝을 더듬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너의 손끝이 그리는 언어는 너의 퀘냐보다도 훨씬 정직하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이나 내 손끝을 더듬는 너를 또 다시 그대로 두었다. 



0.

 우리는 시간 속에서 별처럼 늙어갔다. 한 때는 푸른 별이었다가 붉게 타오르며 나이를 먹어가는 별처럼. 

 요정의 삶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니었음으로 괜찮으리라고 여겼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들이 그 길고 긴 시간을 넘어 너무 자주 찾아오지 않더라도 괜찮으리라고. 우리는 별처럼 긴 시간을 두발로 버티고 살아있으리라고.


 우리는 시간 속에서 별처럼 늙어갔다. 긴 시간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영생을 삶으로 하는 우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 우리는 영생을, 삶을 과신했는지도 모른다. 에다인의 삶과는 다르게 우리의 시간은 언제든 처음처럼 돌아오는 것이리라고. 



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바다에 나가본 적은 어린 시절 이후로 내게 없었다. 청년이었던 너와 손을 붙잡고 아무도 없는 그 들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던 때를 제외하면. 배를 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아버지의 왕국은, 그리고 나의 왕국은 깊은 숲 안에 존재했다. 

 배를 탄다는 것이 고된 일이 아님을 빈다. 서녘으로 가는 너의 마지막 여행조차 고되지는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음으로. 



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1.

 네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구로부터 어떻게 도달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네가 탄 배가 여기에 닿기까지, 나는 그것이 얼마나 걸릴까 손을 꼽아 생각한다. 이곳의 하루들은 충분하고 풍족하여 낮과 밤의 경계도 날과 날의 경계도 온통 흐리다. 온유한 양수에 감싸인 양 나는 현자도 치유자도 아닌 별의 계보 끝자락의 어떤 요정으로 돌아와 너를 기다린다. 

 너의 배가 순풍에 휩싸여 그 먼 길을 하루처럼 돌아오기를. 너는 고단하겠지. 나는 오래도록 네가 그 고단한 세월을 혼자 견디도록 너를 두었다. 네가 돌아오면 잠든 네 머리칼을 손끝으로 천천히 빗어내던 그 여름날처럼 너를 쉬이게 할 수 있을까.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

스란엘 합작에 제출했던 글. 제목은 달리 정할게 없어서.  요즘 자주듣는 Manhattan을 BGM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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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관제탑

from archive/Tolkien 2014. 3. 23. 22:22



0. 

  너는 지상의 중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있을까. 


0. 

  나는 단 한 번도 네 비행기에 타 본적이 없다.


1. 

  밤의 공항은 적막하다. 그 적막함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피로와 긴장감 이따금 무거운 설렘을 읽는다. 너는 얼마나 많은 공항의 벽들이 창의 형태를 하고 밖을 향해 나있는지 알고 있을까. 밤이 되어 불빛이 하나 둘 켜져도 공항은 흰 백색등의 빛 아래에서 조용하고 음울하게 빛난다. 밤의 어둠과 주홍색으로 부옇게 빛나는 빛들이 안으로 스며들어 창가의 벤치에 몸을 기대고 잠을 청하는 이들의 발치를 얕은 파도처럼 감싸면 많은 기계들이 멀리서 내는 웅웅거리는 진동이 그 위를 얄팍한 담요처럼 덮는다. 마치 조용한 새벽의 집에서 울리는 냉장고의 소리처럼 멀리서 진동으로만 전해져오는 소리들 사이에서 창하나 뚫려있지 않은 화물기가 날아와 새벽을 맞는다. 

  사람들에게는 제각각의 행선지가 제각각의 삶이 있다. 켜지는 활주로의 유도등만큼의 삶. 매일 뜨고 내리는 수백편의 비행기와 비행기의 행선지만큼의 삶과 고향들이 공항의 온갖곳들에서 형태가 되지 못한 채로, 기다림으로 살아 숨을 쉰다. 너는 그것들이 피곤하게 토해내는 숨들을, 오르내리는 가슴과 등을 알고 있을까. 너는 그것들을 싣고 나는 것이다. 너는. 나의 너는. 


2. 

  나는 단 한 번도 네 비행기에 타 본적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삶과, 행선지와, 감정들이 너의 비행기에 실려 목적지를 향해 떠나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나는 단 한번도 너와 함께 어디로든 날아본 적이 없다. 너의 비행기는 아늑하겠지. 네가 실어나르던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의 요람처럼, 거쳐가는 고래의 뱃속처럼 따듯하고 부드럽게 저 길고 둥근 지구의 항로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돌아오는 공항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네가 떠나는 그곳이 아니라 네가 돌아올 곳에서 나는 새벽의 관제탑을 밝히고 너의 발치 아래에서 너의 가느다란 새의 발같은 비행기의 보조바퀴 아래에서 빛나는 활주로를 연다. 


3.

  피곤을 끌며 돌아오는 너를 반기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너의 그 육중한 기체. 하늘을 나는 고래처럼 우아하고 무거우며 아름다운 것이 미끄러져 들어오기를 대비하면서 나는 너를 위해서 불을 밝히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관제탑의 새벽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목은 잠기고, 나는 끊임없이 따듯한 싸구려 커피를 잔에 채워 넣으면서 너를 기다린다. 무사히 너의 비행기가 땅에 내려앉는 순간 느끼는 환희를 내가 어떤 말로 설명해야할까. 통신기를 타고 전해지는 너의 얕은 한숨소리. 너의 안도감. 나는 오래도록 그 목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샜다. 네가 어두운 시야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누구보다도 오랜 야간비행을 하는 너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그 밤이 주는 고독과 싸워 이겨내고 있는 너를 위하여. 

  너의 그 무거운 짐들이, 책임감들이 덜컹거리지 않고 다치지 않게 무사히 그 긴 활주로를 내려와 내게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0. 

  너는 지상의 중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있을까. 중력처럼 온전하게 너를 끌어당겨 돌아오게 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너를 지상으로. 너를 너른 시멘트의 평야위로, 너를 공항으로, 너를 내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0. 

  사랑하는 엘론드. 네가 내게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0. 

  너는 지상의 중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있을까.




-

관제탑의 관제사 스란두일과 파일럿 엘론드를 바탕으로한 조각. AU. 

밤공항과 관제탑과 비행기와 빛나는 활주로는 모두 로맨틱 합니다. BGM은 Sara Bareilles의 Gravity.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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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이제는

from archive/Tolkien 2014. 3. 17. 23:54




 산책을 가야지. 그는 돌연히 긴 회랑을 넘어와 장서관의 계단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선다. 정무를 마친 푸른 옷을 입은 채다. 엘론드는 계단 위에 앉아있다 마중을 나온 길갈라드를 보며 손을 뻗었다. 산책을 가야지. 길갈라드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회랑의 긴 아치를 따라 메아리처럼 넘실거리고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린돈의 언어는 오래된 요정의 주문과 같다. 엘론드는 그의 손을 잡고 느리게 언덕을 따라 내려간다. 린돈에 피는 황금 같은 꽃들이 작은 발에 채이는 동안 서녘으로 느리게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바다가 보일 때까지 느리게 언덕을 내려가 짙푸른 옷에 풀물이 들도록 앉아 엘론드를 안는다. 엘론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숨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숨이 차오기 시작하면 다시 입술을 열어 큰 숨을 내어 쉬고 다시 숨을 멈춘다. 그의 숨소리는 공기의 소리처럼, 여름의 고요한 더운 바람처럼 들고 난다. 그는 긴 소매가 풀물에, 풀꽃에 스쳐 물이 들도록 너른 품을 한껏 내어주고 이야기한다. 요정의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서 엘론드는 어렴풋한 별들의 이야기를, 에아렌딜의 이야기와, 서녘으로 향하는 바다의 이야기와 조선공의 이야기를 듣는다. 엘론드는 길게 숨을 멈춘다. 이번에는, 숨이 차오르지 않는다. 그는 섬세하지 못한 손끝으로 풀꽃을 뜯어 줄기를 엮기 시작한다. 창을 쥐는 손이 여린 손에 닿으면 거친 굳은살에 여린 살이 발갛게 쓸리기도 수차례였다. 엘론드는 그가 끼워주는 어설픈 풀꽃 반지를 손에 끼우고 그의 가슴 위로 머리를 기댄다. 숨도 쉬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품은 넓고 평온하다. 가위라도 눌린 듯 갑갑하게 메인 성대로 엘론드는 가까스로 가느다란 자장가를 부른다. 놀도르의 자장가구나. 엘론드는 새처럼 놀라 그를 돌아본다. 지는 햇살에 빛나는 얼굴은 평온하고 희미하다. 엘론드는 숨을 헐떡인다. 길갈라드의 손이 가만히 가슴을 누른다. 길고 어두운 밤길을 헤메이던 이들의 자장가를 들어도 길갈라드의 얼굴은 여전히 지는 햇살에 비쳐 흐리다. 엘론드는 오랫동안 그가 잇는 말을 기다린다. 눈을 깜박이면 시간이 반토막이 난 듯 길갈라드는 웃는다. 그 분은 뱃노래 밖에 모르던 분이란다 페레델. 누가요? 소리가 되지 않는 말로 물으면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누가요? 그의 얼굴은 여전히 햇살에 비쳐 희미한 형체처럼 보인다. 페레델. 부르는 소리에 다시 돌아보면 길갈라드는 이제 흰 모퉁이를 돌아 아치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다. 쪽빛 의복을 걸치고 흰 자수로 별을 박은 금빛 요대. 장신의 왕. 엘론드는 침상의 머리에 기댄 몸을 일으켜 손에 든 책을 내려놓는다. 일어나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따듯하고 단호하다. 왕의 목소리는 서슬퍼렇게 날이 서지 않고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끔 했다. 그는 아치 아래에서 침상까지 성큼 한걸음에 걸어와 침상 끝에 앉는다. 너른너른 퍼진 의복이 홑겹의 이불을 덮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는 손을 뻗어 길게 자란 발목을 붙잡는다. 봄꽃이 예쁘게 피었더구나. 그의 옷에서는 가을처럼 서늘한 바람의 내음이 난다. 산책을 가야지, 아가. 느리게 목이 메여온다. 

 언제쯤 일어날 셈이냐. 서늘한 손이 머리를 짚는다. 엘론드는 눈을 감는다. 그의 음성에 머리가 혼곤하다. 마치 의식이라도 잃었던 양 혼미하다. 엘론드는 그의 등 뒤로 팔을 견고하게 가다듬는다. 느리게 차오르는 울음소리를 겨우 삼켜내면 그의 목소리에는 따듯한 웃음소리가 섞인다. 언제쯤 나을 셈이냐 페레델. 그는 연기처럼 빠져나가 견고하게 고쳐 안은 두 팔은 둥근 흔적처럼 남는다. 

 이제 그만 아플 때도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긴 회랑을 따라 들리던 메아리처럼 흘러든다. 그는 이제 저 회랑의 끝에, 저 회랑의 문 너머에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그만 아플 때도 되었다, 페레델. 가까스로 차오르는 울음을 삼켰는데도 감은 눈커풀이 뜨거워진다. 눈을 뜨면, 이제 눈을 뜨면 그의 목소리도 사라질 것을 어렴풋이 안다. 페레델. 조금만 더. 페레델. 제발. 


 

 “엘론드.”

 엘론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밤에 어울리지 않는다. 뜨지 못한 눈으로도 그가 린돈에 남은 마지막 황금색 들처럼 웃는 것이 선하다.

 “핀웨 가의 자장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당신뿐일 겁니다.”

 “가세요.”

 지금은. 덧붙이지 않아도 글로르핀델은 가야할 때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눈꺼풀에 남은 잔상이라도 더듬으려는 애처로운 후희를 그는 웃음기 어린 한마디로 깨트려놓는다. 햇살처럼 따스하게, 요정의 목울대를 울려 퍼지는 소리는 먼 회랑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한 겹 꿈 안으로 밀어 넣는다. 페레델. 산책을 가야지 아가. 저 먼 회랑 끝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가물가물 사그라든다. 

 “좀 더 눈을 붙이는 게 좋겠네요.”

 엘론드는 그의 말에 몸을 일으켜 침상의 머리에 기대어 앉는다. 글로르핀델은 가만히 웃음만 지었다. 그 웃음에 섞인 연민을 헤아리는데도 이제는 지쳐 손이 얼굴을 덮는다. 


 

 산책을 가야지, 아가. 산책을…. 이제는 당신을 보면 아, 꿈이로구나. 산책을 가야지. 희미하게 빛나는 마치 흐려진 그림 같은 얼굴을 하고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꺼내는지 당신의 모습은 여전히 쉽게 그려진다. 오후의 정무를 마치고 장서관 앞까지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달려오던 옷이 어떤 쪽빛이었는지, 옷깃을 여민 요대에 박힌 흰 별은 몇이나 되었는지도 여전히 셀 수 있었다. 장신의 몸을 뒤덮은 새벽 동틀녘 같던 옷들. 걸음을 옮기던 발이 어떻게 긴 옷자락 끝을 들어올렸는지, 그 묵직하고 소리 없는 발걸음이 어떻게 새벽 공기를 울리며 침상으로 스며들었는지 조차도 생생하다. 점막 안을 아프게 갈퀴고 지나가는 그 봄날 린돈에 피던 황금같은 꽃향기. 세월에 바라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키면 어렴풋한 감정만 남는 것이 꿈인 줄로만 알았는데. 꿈에서도 꿈이로구나. 목이 메이고 나면 그 뒤에는 꿈에서조차 이제는 그만 아플 때가 되질 않았느냐 다독여, 겨우 추슬러 감춘 것들을 열고 등을 떠미는 손길이 야속해서 메인 목이 아프다. 

 언덕빼기 아래로 여름마다 강이 범람하면 이듬해에는 풍족한 옥토로 다시금 변하던 린돈의 땅들. 평야들. 언덕과 실개울들. 당신의 남색 옷자락 끝에서 누웠다 일어나던 그 여리고 따사롭던 풀잎들. 그 시절에는 놀랍지 않았던 당신이 일궈낸 풍요로움의 흔적들. 그 가운데에서 금방이라도 당신이 임라드리스의 기둥 사이를 넘어 들이닥칠 것만 같은 꿈을 눈을 뜨고는 꾼다. 전쟁의 상처를 짊어진 채로 젊은 청년에서 왕으로 자란 당신 걸음에 소리가 있을 리 없어 문득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는 바람소리에도 임라드리스의 흰 기둥 사이를 돌아본다. 발걸음에 소리라도 있었다면 문득, 문득 누구도 없는 회랑을 돌아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흰 기둥사이로 푸른 옷자락을 찾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어서. 

 꿈도 꾸지 않는 긴 잠에 들면 그리움도 사라지지 않을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녘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으면 오래 전에 떠난 당신이 아름다운 항구에 나와 맞아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헤아린다. 해변을 따라 요정들이 뿌려놓은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있다는 모래사장을 맨발로 내딛으면 몸이 젖어들다 바다의 물처럼 변할 때까지 그 모래에 박혀 당신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바다의 물처럼 변할 때까지.  

 꿈에서 당신을 볼 때마다 이제는 꿈이구나 참아온 눈물들을 쏟아내면 지금도 나는 바다처럼.

 

 산책을 가야지, 아가. 이제는 당신을 보면 아, 꿈이로구나. 어른어른 물에 잠겨.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황인숙, 꿈.



-

길엘 합작에 공개되었던 글입니다 :) 

본래 생각했던 bgm은 라나 델 레이의 Young and Beautiful 이었는데, 글 보고 떠오른다고 해주신 노래가 더 어울려서 넣었어요: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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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LITM

2014. 2. 2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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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단문

from archive/Tolkien 2014. 2. 25. 03:03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희다. 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나이인데도 너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였다. 고사리처럼 작던 손에서는 손가락들이 얇고 아름다운 봄날의 가지처럼 자랐고, 희고 긴 팔다리는 조금씩 안부터 단단해졌다. 입에 포도알을 물려주면 겨우 한 입에 머금던 입술도, 곧지만 야트막한 산등성이 같던 콧대도 자랐다. 색이 짙어지고 입술이 벌어지면 아이 특유의 크고 귀엽던 이빨들도 가지런한 모양으로 변해있었다. 우묵하게 자란 뼈대 안의 눈동자 위로는 짙고 아름다운 그늘이 졌다. 그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니. 손을 뻗어 책을 건네받을 때 마다 매끄러운 팔 아래로 느리게 걷혀 내려가는 소맷자락. 콩콩 발을 구르고 너른 들 위를 뛰어다니던 두 다리는 이제 제법 청년의 것처럼 움직인다. 뛰지도 발을 구르지도 않는 발걸음 아래에서 움직임에 파도처럼 일렁여오는 대기가 얼굴을 부드럽게 감쌀 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느리게 물밀 듯 밀려오는 따듯한 봄바람을! 엘론드. 그렇게 부르면 돌아보는 너는, 오른 어깨를 뒤로 밀어내며 얼굴을 돌린다. 너의 가느다란 목이 돌아보는 얼굴을 따라 움직이고, 속눈썹을 매끄럽게 들어올리고나면 짙게 변한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소리 없이 초조한 것 없이 움직인다. 그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너와 너의 그림자와 너의 미래 사이에서 느린 바람에 이는 갈대처럼 휘청인다. 너의 얼굴에서 여전히 어린 너를 보고, 청년처럼 빛나듯 아름다운 너와, 무르익어 성년이 된 너를 본다. 너의 얼굴은 오래 전에 알고 있던 그 친우의 것처럼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피를 빌어 지금보다 아름답게, 요정이 가장 사랑하는 과실처럼 농익어 갈테다. 새로 난 여린 가지처럼 길게 자란 손가락은 뼈마디가 자라고, 그 손끝에 검과 책으로 상처입은 굳은살이 둥지를 틀 듯 자리를 잡겠지. 너의 다리는 내가 곧 등 뒤에 서서 팔을 벌려주지 않아도 될만큼 곧게 땅을 딛고 서는 법을 알게 될 터였다. 요정의 예지력이 아니라 너의 얼굴이, 너의 젊은 얼굴에 켜켜이 쌓인 너의 핏줄과 너의 어린 시절이 보여주는 그림자이다. 빛이 변하면 사물의 색이 변하듯이. 네가 살아가는 시간과 함께 내가 알고 있던 작은 몸도 탈 없이 변해간다. 나의 성채에서. 빛이 드는 상아색의 회랑을 따라 걸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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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뱀파이어AU







 물기를 머금은 거리는 가스등불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퀴퀴한 가죽냄새가 올라올 정도로 잔뜩 젖어 내피까지 물컹해진 구두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물에 비친 등불이 주홍색으로 흔들렸다. 거리는 이른 잠에 빠져있었다. 옆으로 좁고 위로 층을 더한 벽돌건물들은 모두 커튼을 닫고 추운 겨울의 밤을 일지감치 잠의 뒷켠으로 보낸다. 어깨를 나란히 한 건물 굴뚝 위로 물기에 젖은 연기만 짧은 입김처럼 새어나왔다. 남자는 검은 우산을 접고 코트의 어깨에 맺힌 빗방울을 턴다. 무릎을 한차례 크게 들어 올려야 내딛을 수 있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문을 두드리자 문 위의 작은 아치형 창문 너머로 불이 들었다. 필라멘트가 거의 다 타들어가 음울한 주홍색으로 빛나는 낡은 전깃불이 깜박인다. 곧 전구를 갈아주어야 할 테지만 그 전에 이 집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는 머리끝까지 온통 붉은 담요로 몸을 뒤덮은 채 나와 문을 열었다. 곳곳이 구겨진 셔츠 위로 아무렇게나 헝클어지고 쳐진 금발과 차가운 나무 바닥을 딛고 있는 창백하고 큰 발. 그는 좀 전에 그가 내려왔을 계단의 난간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남자를 바라본다. 몸을 기대고 있던 검은 우산살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둥글게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자 그의 오른발이 뒤로 물러났다.

 “늦었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건조하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담요를 추켜올리던 손으로 목덜미를 누르고 얕은 헛기침을 뱉는다.

 “먹을 만한 걸 좀 가져오느라.”

 “그 놈의 쥐새끼는 집 안에도 충분해, 엘론드.”

 그의 걸음은 폭이 크다. 스란두일은 신경질 적으로 엘론드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아 벽에 검은 우산을 기대어 놓는다. 엘론드는 그의 행동에도 희미하게 웃으며 신문지로 여러 번 감싸 동여맨 꾸러미를 내밀었다. 빗물에 얼룩져 푹 젖은 꾸러미를 받아들자 스란두일의 손 안에서 꾸러미가 팔딱 뛴다.

 “사람이 이렇게 작을 리는 없을테고.”

 꾸러미가 힘없이 또 팔딱 뛰었다.

 “토끼야. 구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어.”

 엘론드는 비에 젖은 코트를 벗는다. 주홍색의 타 들어간 필라멘트 아래서 그의 입술은 희게 질린 것처럼 보인다.

 “모처럼의 비오는 날인데 시체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제발 그냥 받아. 앞으로 보름은 또 쥐새끼로 연명해야 할 테니까.”

 엘론드의 손이 스란두일의 어깨 위에 잠시 머무른다. 그의 젖은 손이 스란두일이 아무렇게나 뒤집어쓴 담요 모퉁이를 깊은 색으로 적셨다.

비가 오는 날 만큼 먹이를 구하기에 적당한 날도 없었다. 싸구려 비옷으로 감싼 경찰들은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일찌감치 골목사이로 사라지고 밤마다 들끓던 사창가도 장사를 접는 날이었다. 피의 냄새, 사체의 갓 부패하기 시작하는 싱싱한 살의 냄새도 빗물에 씻겨나가는 날이었다. 운이 좋으면 불어난 강물 위로 신선한 사체 하나쯤이 떠오르기도 하는 몫 좋은 날인데 그는 지금 모처럼의 포식을 놓쳐버렸다고 순순히 터놓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꾸러미의 머리가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손을 얹는다. 손바닥 아래에서 가늘게 오르내리던 숨이 잠시 끊어진다. 다시 움직인다.

 “멍청하긴. 사람 목 좀 뜯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고상한 척을 하느냔 말야.”

 스란두일은 그의 발아래에서 푹 젖어버린 현관 깔개를 흰 발로 걷어찬다.

 “피곤하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한다. 스란두일이 금방이라도 쏟아낼 불평들을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투였다.

 “이만한 토끼 한 마리로 두 사람 배가 찰 것 같은가?”

 스란두일은 꾸러미 아래에서 종이가 젖은 소리로 퍼덕이는 소리를 듣는다. 머리 아래로 손가락 두마디를 더듬자 짐승의 모가지가 손아귀에 꽉 찼다.

 “자네 혼자 마셔. 난 됐으니까.”

 

 “굶어 죽기라도 하려고?”

 스란두일의 말에 엘론드는 웃는다.

 “제발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겠군.”

 푹 젖은 웃음이었다.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엘론드는 스란두일에게서 등을 돌려 현관을 꽉 채운 계단을 밟아 오른다. 그의 뒷모습은 물에 젖은 토끼 따위나 주우러 다녔던 사람답지 않게 단정하다. 그의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 밑에서 얇게 접힌 깃과 그 밑으로 가느다란 선으로 내려오는 박음새들. 엘론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팔에 걸린 코트를 고쳐 맨 다음 자신이 올라온 계단에 남은 구두모양의 물자욱을 바라보고 구두를 벗었다. 그는 검지와 중지로 구두를 가지런히 모아 손에 든다. 이제는 물에 젖은 그의 발을 감싼 얇은 천에서 물이 배어나온다. 스란두일은 머리 끝까지 뒤덮고 있던 담요를 뒤로 젖힌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계단 위로 사라진다.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운 계단을 오르면 그 위에는 작은 거실이 있었다. 낡은 벽은 벽지를 바른지 적어도 이십여년은 지난 것처럼 붉은 것들이 죄 시간에 바래 갈색으로 변한, 드문드문 검은 페이즐리 문양만이 얼룩처럼 남은 거실. 스란두일은 열린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느리고 끌리는 발걸음으로 카페트 위를 걸어다니는 엘론드를 바라본다. 그는 비에 젖은 코트를 걸어두고 양말을 벗어 젖은 장작이 타는 난롯가에 널어둔 뒤에 낡고 붉은 소파에 완전히 몸을 파묻는다. 그가 소파에 앉아 아래로 푹 꺼져가는 동안 검은 광목천 같은 머리칼이 등받이를 문질렀다.

 “엘론드.”

 손바닥 위의 꾸러미는 스란두일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계단 위에 점점이 물자욱을 냈다. 물자욱을 내던 것이 거실의 문가에 와서는 발등 위로 묽어진 피 같은 것을 떨어트린다. 손 안에서 헐떡이던 숨이 멈춘 것도 같다. 스란두일은 엘론드를 불렀다.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알파벳을 전부 하나의 음절로 만들어 부르듯이 정확한 발음으로. 아마도 스란두일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그는 오십년 전에도, 그리고 아마 백년이나 이백년 전에도 또는 십수세기 전에도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느리게 형태를 바꾸어 입는 언어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과 함께 /예전의 언어를 입은 채다. 언어는 세월에 닳지 않았는데 혀끝을 맴도는 공기가 뭉툭해졌다.

 “조금이라도 마시는 게 어때.”

 스란두일은 토끼의 몸을 감싼 신문지를 한 겹씩 벗겼다. 짐승에 몸에 철퍽하게 달라붙은 종이는 하나의 작은 지면기사가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 끝에서 섬유처럼 뭉그러졌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타는 장작과 난롯가 그 어디쯤에 있다. 손이 이번에는 뭉그러지는 종잇장을 단번에 뜯어낸다. 젖은 짐승의 털이 얇은 살점과 함께 손톱 아래에 박혔다. 뜯겨나간 종잇장 아래로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내는 짐승은 갈색 들토끼였다.

스란두일은 기댄 어깨를 추슬러 선다. 핏물이 떨어진 발등은 희고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마른 발등 위로 단단하고 굵은 뼈가 도드라진다.

 “마셔.”

 내민 손은 갈색의 짐승털로 지저분하다. 짐승의 몸통은 드문드문 살점이 패였다.

 “나는 됐어. 자네나 마시게.”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니잖아.”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닌데 뭐 어떤가.”

 그의 검은 머리칼이 골이 패인 소파의 등받이 위에서 이리저리 뭉개진다. 엘론드는 여전히 질린 입술을 하고 눈꺼풀과 눈동자만 들어 스란두일을 올려본다. 엘론드는 그의 오래된 연인의, 아니 어쩌면 연인은 아닐 남자의 입술에 스산한 웃음이 걸리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다. 얕은 웃음이 짐승의 살점처럼 가느다란 입술의 주름 곳곳에 저며있다.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자네가 원했잖아.”

 

 “날 사랑하니 제발 같이 있게 해달라고 한 건 자네였어.”

 스란두일은 오른 무릎을 바닥에 대고 꿇어앉는다. 그의 무릎위에 살점이 떨어져나간 작은 짐승을 얹고 짐승의 털과 피와 살로 얼룩이 진 손가락으로 긴 금발을 쓸어 넘긴다.

 “더 말렸어야지. 사랑스러운 엘론드. 죽은 쥐새끼 시체에 이빨이나 파묻고 사는 삶이어도 괜찮느냐고 물었어야지. 장작이 타는 난롯가에 기대어 앉아도 온기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삶이어도 괜찮느냐고 물었어야지.”

 이렇게 추운 겨울인데 말이야. 엘론드. 가느다랗고 부석한 금발에 붉은 물이 든다. 그는 스란두일의 눈길을 피하는데 벅차 시선을 돌리다가 스란두일의 머리칼에 남은 붉은 자욱들을 보고 입을 틀어막는다.

 “자네는,”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목소리가 새 나왔다.

 “자네는 그렇게 하게.”

 물에 젖은 장작이 타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헐떡이던 짐승의 숨소리도 멈춘지 오래였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오래전부터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자네는 그렇게 해.”

 스란두일은 입을 틀어막은 엘론드의 손을 바라본다. 식물의 수관처럼 마른 손가락 마디마디 불거져 나온 뼈대와 낮은 온도에 벌겋게 번진 손등. 스란두일의 시선을 느낀 손이 남은 손등을 덮어 문지른다.

 “내가? 누굴?”

 옅은 회색 눈이 아주 짧게 스란두일의 눈동자에 머무른다.

 “누구한테!”

 스란두일은 그의 무릎 위에 올려진 짐승 채로 그의 다리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스산하고 아름다운 얼굴 아래에서 드러난 송곳니가 번쩍였다. 그는 스란두일의 표정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는 듯이 한껏 숨을 끌어올려 가슴을 부풀리면서 몸을 뒤로 젖힌다. 엘론드는 눈을 감고 목을 어깨에 파묻은 채로 고개를 완전히 튼다.

 ‘알잖아.’

 그는 입술은 눅눅하게 젖어 열리지 않았고 그의 목은 뒤틀려 목울대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스란두일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따금 환청처럼 엘론드는 소리도 목소리도 아닌 것으로 대답한다.

 스란두일의 몸 아래에서 들짐승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둥근 봉오리처럼 짐승의 내장을 감싼 갈비뼈들이 차례로 부러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부러진 뼈가 그것의 내장을 가르고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열린 구멍에서 핏물이 흘러나온다. 그의 바지위로 짐승의 피가 축축하게 젖어든다. 스란두일이 짐승의 몸 위에 싣은 무게를 덜어내자 그는 겨우 숨을 몰아 내쉬었다. 뒤로 젖혀져 한껏 부풀었던 그의 가슴이 가라앉는다.

 

 “자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건 내가 자넬 사랑해서였지. 자네가 날 사랑해서가 아니었지.”

 

 엘론드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몸에서 들짐승의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린다. 비좁은 틈새 사이를 갉아먹고 사는 쥐들이 짐승의 피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스란두일은 두 무릎을 모두 땅에 붙이고 엘론드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그가 놀라 파득 몸을 떤다. 푹 젖은 들짐승의 목덜미에 드러낸 이를 박으면 드러낸 송곳니가 가죽을 찢고 들어가는 파열음이 났다. 엘론드는 스란두일의 어깨위로 흘러내린 머리칼들을 손등으로 걷어내어 귀에 걸었다. 스란두일은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그는 스란두일의 버석한 머리칼 끝을 손가락에 끼워 느리게 문지르다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입술을 벌렸다. 짐승의 체온은 비에 씻겨내려가 완전히 차가워 진 줄로만 알았는데 피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도로 뛸 것처럼 따듯했다. 스란두일은 열린 입술 사이로 천천히 자신의 입안에 고여있던 피를 흘려넣었다. 머리칼을 쥐는 엘론드의 손을 잡았던 손이 그의 팔을 타고 올라가, 희고 마른 목을 더듬어 그의 뺨으로 옮겨간다. 열린 입술이 닫히지 못하도록 엄지 끝으로 입술 아래의 도톰한 살을 힘주어 눌러 내리면 길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뺨을 감싼다. 스란두일은 흘려 넣은 것들이 그의 선분홍색 목젖 뒤로 넘어가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힘줄이 도드라진 손을 떼어냈다.

 “그래도 쥐보다는 낫군. 그렇지 엘론드?”

 “자네 몫은?”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니잖아.”

 입술에 고여있던 피가 막 흐르려는 찰나에 스란두일은 손등으로 제 입술을 훔쳤다. 도처에 쥐새끼가 널려있어도 싱싱한 네발짐승의 피만 못했다. 양도 적은데다가 거죽에서는 시궁창 냄새가 나는 쥐새끼의 털에 코를 박고 싶을 리가 없었다. 막 입에 피칠을 하니 목구멍 뒤에서 찌르는 듯한 갈증이 올라온다. 엘론드는 허리를 세우며 일어나던 스란두일의 팔목을 붙잡는다.

 “왜.”

 엘론드는 가늘게 떨리는 팔목을 더듬어 손바닥이 움푹 패이도록 갈등을 거머쥔 주먹을 손에 넣는다. 접힌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나가는 동안 힘겹게 돌아서려던 스란두일의 시선이 정수리에 꽂혀있는 것이 생생하다. 펼쳐진 스란두일의 손바닥에는 짐승의 털과 핏자국만 남았다. 그는 힘이 빠진 스란두일의 손바닥을 들어올려 자신의 왼 목덜미에 얹는다. 스란두일이 얼마간의 정적을 지키다 얕은 목소리로 웃었다. 마른 목덜미에는 여러 번이나 같은 자리에 흉터가 졌던 듯이 피부의 색이 붉게 변한 자국이 나란하다. 스란두일이 허리를 숙인다. 모처럼 그가 넘겨준 머리칼들이 쏟아졌다. 자네, 나한테 숨기는게 있지? 스란두일이 속삭인다. 그리고 허연 살결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뒤통수에 무게추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목이 꺾였다.

 

 

 

 

 “해가 일찍 져서 다행이었어.”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작은 들짐승을 하나 잡았던 날 후로 엘론드는 제대로 밖을 나다닐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드물게 오래도록 비도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임에도 몸이 나아졌다는 핑계로 엘론드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근래에 일찌감치 해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어둑한 하늘 탓에 제대로 빛이 들지 않아 몇몇일은 낮에도 커튼을 열어놓기도 했다. 엘론드는 외투를 벗고 희미하게 비쳐드는 빛을 가려주던 모자를 벗는다. 그가 소매 끝의 커프스단추를 완전히 풀어내 난롯가 위에 올려둘 때까지도 스란두일은 말이 없었다.

 “빈 손이라서 화가 났나, 자네?”

 “내가 그따위 것으로 화내는 치졸한 놈이었나.”

 “음.”

 엘론드는 얄팍하게 웃었다. 글쎄.

 “그렇게 보인다는 거군.”

 

 “어떤 남자가 전해달라고 하던데.”

 스란두일은 뜸을 들이다 팔짱을 풀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엘론드에게 내밀었다. 엘론드가 손을 뻗는 순간 스란두일은 편지의 모퉁이로 제 뺨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 거처를 아는 사람이 있나?”

 “아니”

 “알려주지도 않은 집 문을 두드려서 직접 편지를 전해줬는데도?”

 “모르는 일이야.”

 날카로운 모서리가 엘론드의 턱끝을 훑었다.

 “자네가 훔쳐보는 그 남자더군. 응? 검은 머리에 눈이 잿..”

 스란두일은 소리내어 하하 웃는다. 엘론드의 뺨이 얼어붙어있었다. 이름이 무어라고 했더라. 무어라고 전해달라고 했더라. 편지의 겉면은 깨끗한 흰색이다. 받는 이의 이름도, 쓰는 사람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다. 아마도 엘론드는 스란두일이 그의 눈길을 거기까지 쫓았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스란두일은 얼어붙은 엘론드를 바라보다 그의 얼굴 옆으로 손을 뻗어 창문을 가린 커튼을 들춰본다. 남자는 거리의 모퉁이 건물의 그림자 안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엘론드가 거리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편지를 전해주고는 사라진 듯 했던 남자는 엘론드의 모습이 창문에서 보일 때쯤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얼어붙은 걸 보니 아는 사람이야.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자네는 아나?”

 엘론드는 그의 턱끝을 날카롭게 훑는 편지를 잡아챈다. 깨끗한 겉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편지를 뒤집었을 때 그는 봉되어있던 밀랍이 한차례 뜯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 숨길 일도 아니잖아.”

 안 그런가? 자네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알아야지. 엘론드는 느린 손으로 봉이 뜯겨나간 편지지를 펼쳤다. 스란두일이 떨리는 엘론드의 손목을 받친다.

 “그래서 그 자가 말하는 대로 같이 떠나려고? 으슥한 창문 뒤에 숨어서 바라만 보던 자네가?”

스란두일은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들어 편지를 읽는 엘론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어붙은 뺨이 잘게 떨린다. 그는 펼쳐진 편지를 다시 접는다. 원래 접혀있던 모양대로 천천히 접어 닫히지 않는 도톰한 밀랍을 엄지로 더듬었다.

 “그 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길-”

 “길 갈라드.”

 “잘 아는군. 단박에 나올 정도야. 입 속에서 수천 번은 굴려봤나?”

 “스란두일!”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쥐고있던 편지가 손끝에서 스윽 빠져나간다. 엘론드가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돌아보았을 때 스란두일은 이미 타는 난롯가에 편지를 던져넣고 있었다. 탁, 탁. 하고 종이 끝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멈춘다.

 “자네는 못 가.”

 

 “날 이렇게 만든 건 자네야,”

 엘론드는 한참동안 허망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스란두일의 팔은 희고 차가운 뱀처럼 엘론드의 목과 등을 감싼다. 스란두일의 팔은 뱀처럼 차갑고 뱀의 비늘처럼 단단하다. 빈틈없이 끌어안기면 물에 잠긴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개같군. 알아?”

 스란두일은 엘론드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손톱 아래의 피부는 푸르스름하게 질린 색이었다. 한겨울인데도 말을 내뱉는 입술 끝에서는 입김이 흐르지 않는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자네는 외롭고 무지했지. 긴 시간을 혼자 보내기에는 무서워서 날 선택했어. 그자들의 밀회도, 그자들이 어떻게 사냥하는지도 몰랐지. 자네한테는 나 밖에 없었어. 자네만큼 무지하고 자네에게 의지하는 나 밖에는.”

 “그런데, 저. 창 밖에.”

 비늘처럼 단단한 팔 안에서 그는 창을 향해 돌아선다. 완전히 어두워진 창 밖으로 흐린 가스등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엘론드의 어깨를 쥐었다. 엘론드의 마른 등에 가슴팍이 닿는다. 스란두일의 입술이 목덜미 뒤에 숨을 끼치고 다가와 귓가에 말했다.

 “자네가 오랫동안 바란 그 사람이 자네와, 나와 같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늘 궁금했지. 자네가 비오는 거리를, 해 진 거리를 걸으면서 뭘 보고 다니는지. 자네와 다르게 나는 여전히 약한 볕 아래에도 나갈 수가 없는 몸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자네의 시선을 쫓기 시작한 거야.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지. 자네는 쉽게 어디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유달리 자네가 오래 지켜보는 때가 있어. 이따금 동쪽의 체링크로스가를 따라서 광장으로 나서는 남자. 이름이, 그래 길 갈라드라고 했나. 자네가 그 사람을 꽤 오래 바라보더군.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편지를 읽자하니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자가 먼저 접근했을 수도 있겠지. 동족의 냄새 같은 걸 맡고 말이야. 자네가 그 자를 어떻게 알았는 지는 모르지만.

근래에 그 자와 만난 적이 있지? 근래가 아닌가? 조금 더 되었나?

 

 목줄기 뒤부터 소름이 얼음처럼 돋아나는 것 같았다.

 

 요즘 날이 흐렸지. 구름이 많이 낀 날씨더군. 그랬지, 엘론드? 그래서 커튼을 좀 열어놓았지.

 

 “최근에는 자네와 함께 산책을 좀 했는데. 몰랐나?”

 

 자네가 걷는 길을 따라 걷는데 내가 이런 곳에 살았나 싶더군.

 

 엘론드의 눈길이 자신을 창틀과 몸 사이에 가두어 놓은 흰 발등 위로 떨어진다. 푸르스름하게 비치는 혈관에는 아마 피를 먹고 생겨나는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창틀을 붙잡은 손이 파르라하게 떨린다. 스란두일이 목청껏 웃는 소리에 엘론드는 얕은 숨을 들이킨다.

 “그 남자와 만나는 건 즐거웠나? 날 버릴 준비가 충분히 되었느냔 말이야.”

 뱀같은 손. 뱀처럼 느리게 몸을 감은 팔이 허리를 붙들고 갈비뼈 아래의 온통 빈 물컹한 내장을 잡아당겨 안았다. 나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눈치더군. 그 남자. 응? 내장이 아직 거기에 있던가. 오랫동안 수세기동안 음식을 담지 않았던 내장들이 혹여 썩어문드러졌기 때문에 스란두일의 팔 안에서 빈 몸통이 이그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엘론드는 눈을 감는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숨에 색이 없었다. 창가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들의 손이 닿는 곳도 입김이 닿는 곳도 온도로 누그러드는 것은 없었다.

 “내가 말했지 않나.”

 “난 아무데도 못 간다고.”

 “그래.”

 “자넬 그렇게 만들고는 어디에도 못 간다고도 했지.”

 “영리하군.” 

 몸을 감싼 팔등,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흰 팔뚝 위에 가늘게 떠는 손을 얹는다. 어깨위로 내려앉는 스란두일의 턱을 빗겨 두 팔을 젖히자 두 팔은 벗은 허물처럼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묵은 허물처럼.

 

 “자네는 어디까지 자네를 잃을 셈인가.”

 “네가 날 사랑할 때까지.”

 그는 창 밖에서 익숙한 잿빛 눈을 본다. 커튼을 닫는다.

 

 

 “떠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는 스란두일의 품을 헤치고 나와 소파에 앉는다. 천은 군데군데 떨어져나가고 얇고 낡은 솜들이 난롯불 앞에서 노랗게 익었다. 따듯하게 지핀 장작불이 식은 손 끝을 덥히지 못한지도 오래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난롯가의 허름한 소파에 앉는다. 수세기 동안 인간으로 남은 습관처럼. 마치 연기가 피는 굴뚝만이 사람들의 집 사이에 자리 잡은 그 집을 사람의 집처럼 만들었던 것처럼.

스란두일은 창을 등지고 선다. 남자가, 길 갈라드라고 불리는 남자가 엘론드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오래 전부터 체링크로스가를 따라 광장으로 나서는 남자를, 깃이 얇은 신사용 코트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엘론드도 남자가 그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알지 못했다. 상냥한 잿빛 눈. 신사용 코트에 어울리는 곧게 선 등. 처음으로 길갈라드를 거리 위에서 마주쳤을 때, 남자는 숙녀용 양산이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길고 아름다운 하늘색 상자를 들고 빈손으로 가게에 들어서는 엘론드를 위해 문을 잡고 있었다. 단순히 그 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랬지.”

 그는 여러 번 상처가 아물었던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수차례 상처가 아물었던 것처럼 수차례 떠날 생각을 했다. 스란두일이 나서지 못하는 날에. 우묵하게 패인 거리에 쏟아진 햇빛이 여전히 발치에서 흔들리는 저녁을 틈타서 여러 차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은 없었다.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간다는 거짓말에도 스란두일은 보란 듯이 속아넘어갈 것이었으나, 거짓말을 해본적도 그를 속이려고 든 적도 없었다. 떠남은 타는 난롯가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팔걸이에 흩으며 누워있는 그림자 앞에서 녹아있었다. 마치 그들에게 시계가 없듯이 떠난다는 말도 홀연히 사라졌다.

 “자네가 자네를 잃어버린 것처럼.”

 얇은 셔츠가 창틀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스란두일이 창가에 기대어 서있던 몸을 세우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자네가 자네를 잃어버린 것처럼. 어디에 흘리고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란두일이 그를 잃어버린 것처럼 엘론드도 아마 그의 뱀 같은 팔에 휩쓸려서 어딘가에 자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끝도. 시작을 잃어버린 것처럼 끝도 어딘가에 녹아서. 





-

The Gaslight Anthem (가스등 송가) 제목은 모님이 붙여주심. 책으로 내게 되면 쓰고 싶었던 디테일을 좀 더하고 스란두일과 엘론드가 처음 만난 장면, 길갈라드가 엘론드 정체를 파헤치는 부분이 추가된 얇은 중철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책으로 낼지는 잘 모르겠어서 (어차피 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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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깊어도 별이 아득하게 흐려지던 날이 길었다. 추위에도 아픔에도 굳게 견디도록 태어난 요정의 몸에도 찬기운이 뼛속까지 시리게 들던 잠자리가 길었다. 어릴 적에나 보았던 것 같은, 요람에 누운 형제와 본 것만 같은 얇고 투명한 침막도 볕드는 창도 없었다. 얇은 침막 대신 기울고 가문 나뭇가지들로 뒤덮인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면 한기로 가누기 힘들어진 작은 몸을 바싹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빛에 녹을 새라 볕 드는 돌길을 피해 하루를 더 걸으면 밤새 멀리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별을 헤아리는 것이 요정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일이라는데에도 그 별을 헤아리는 일조차 못할만큼 슬픔에 잠긴 표정을 헤아리는 날이 더 많았다. 





 “아가야.”


 “페레델.” 


  소스라치게 놀란 눈으로 번쩍 깨어 몸을 일으킨 엘론드는 두 손으로 침대보를 우그러지게 쥐고 있었다. 밤을 식히던 미풍도 덜자란 아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식혀주지는 못했다. 길고 큰 그림자가 빛을 등지고 발치에 앉아 자그맣게 떨고있는 발목을 느리게 잡았다. 길갈라드는 자상하게 웃는다. 마에드로스도 마글로르도 아이가 자라면서 오랫동안 보아온 그들 주변의 어떤 요정도 저렇게 근심으로부터 벗어난 표정으로 다정하게 웃어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익숙치않아 아이는 되레 놀라 나지막하게 미소 짓는 대왕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다. 

 길갈라드는 그런 아이의 머리 위에 크고 단단한 손을 얹는다. 수차례의 기회에도 결국은 아이들을 되찾아 오지 못한 손으로 그는 아이의 검고 가느다란 머리칼을 느리게 헝클었다. 푹 수그린 고개를 느리게 들어올리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대왕은 조심스레 팔을 벌려 아이의 가느다란 몸을 안는다. 품에 안아도 한참이나 품이 남을 만큼 아이는 말랐고 그만큼 조심스러워졌다. 

 익숙치 않은 애정에 아이는 조심스럽게 등을 말고 몸을 굳힌다. 길갈라드가 아이를 안은 품에서 조금이라도 몸을 떨어트리려고 하는 듯이. 한참이나 그렇게 놓아주지 않고나서야 아이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옷깃을 쥐었다. 작은 손에서 나오는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제아무리 요정의 천이라고 한들 잔뜩 구김이 간 옷을 내일 아침 제대로 입을 수는 없을 터였다. 오래, 별이 조금은 움직였을 무렵에야 아이는 긴장을 풀고 너른 어깨에 악몽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기댔다. 여전히 가쁜 숨소리가 색색거렸고 아이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아이는 여전히 다시 잠에 들지는 못한 것 같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몰라도 길갈라드는 엘론드가 꾸는 악몽이라면 작은 아이가 겪을 수 있는 수많은 두려움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들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어림짐작한다. 아이를 안은 팔이 무거워 조금이라도 자세를 바꿀라치면 매섭게 옷깃을 꽉 붙드는 손길이 옷자락 너머로 느껴진 탓도 있었다. 

 길갈라드의 목소리는 낮고, 다정하다. 마글로르의 노래를 듣고 자란 아이에게는 그다지 특별 할 것 없는 노랫소리였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느리게 아이의 등을 도닥이면서 작게 귀에 속삭인다. 두려움 없는 놀도르의 노래라고 하기에는 너무 상냥했고, 힘있고 낮은 그의 목소리로 부르기엔 지나치게 단조로웠으나 아이는 이해한 듯싶었다. 엘론드는 그의 목소리에서 흐림없이 뻗어나오는 상냥함을, 걱정과 애정을 읽는다. 대왕의 노랫소리는 노래보다는 속삭임에 가깝고, 속삭임보다는 오래된 주문을 외는 것처럼 단조롭다. 잘게 떨리던 아이의 등이 잔잔히 가라앉는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 마라.” 




-

몽골 자장가. Buevein d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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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주워 주는 갱상도 남자 데미. 뎀딕. (데미의 역키잡물이었는데 그냥 데미귀염사물.)

 

  


 

“데미안?”

 

문이 열리자마자 딕은 데미안에게로 달려들었다. 곧장 달려드는 그의 가슴팍을 밀쳐보려고 애를 써도 어린애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브루스처럼 되기 위한 교육을 잘 받았어도 성인의 힘에는 비할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탈리아의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불평할 새도 없이 데미안은 그에게 빽 소릴 내질렀다. 이거 놔 그레이슨! 등 뒤로 숨겨둔 꽃다발은 이미 그의 단단한 팔에 눌려 완전히 찌그러져있었고 딕이 한참을 맞대고 있던 뺨도 어린애처럼 발갛게 달아올라있었다.

 

“데미!”

 

딕은 잔뜩 볼이 부푼 데미안을 보는 체 마는 체 데미안의 팔목을 잡아 집 안으로 끌다가 데미안의 손에 들린 꽃다발과 자신의 발치에 이리저리 흩어진 꽃잎을 보고는 데미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잔뜩 구겨진 꽃다발의 포장지도 책갈피처럼 납작해진 노랗고빨간 꽃들도 데미안의 성에 차지 않았다.

 

“...”

“데미?”

“너 주려고, 너 주려고 오다 주워왔단 말야.”

 

색깔의 조합이 지나치게 알록달록하고 촌스러운 걸 빼면 분명히 꽃집에서 사온 것처럼 밖에는 보이지 않는 꽃다발인데. 딕은 소파에 파묻힐 기세로 몸을 한껏 묻은 채로 심통이 난 데미안을 바라보다 냉기가 스며드는 카펫 위에 무릎을 꿇었다. 너 때문에 다 구겨졌잖아.

 

“데미.”

 

딕은 데미안,하고 다시 한번 데미안을 부르고 눈을 맞췄다. 난 데미가 가져오는거면 정말 주워온 더러운 코카콜라 병이어도 좋아. 진짜 주워온거라니까! 알아. 그리고 코카콜라 병 같은 구린 건 아무도 안 주워! 



 

 

 딕의 아파트에서는 딕의 냄새가 난다. 브루스에게서 나는 냄새와도 웨인저에서 나는 냄새와도 다르다. 비가 오는 날이면 타는 장작의 냄새와 알피가 잘 닦아낸 마르고 윤이 나는 나무 바닥의 냄새, 따듯한 수프와 양초의 냄새와는 다르다.

 난로에서 타는 장작의 냄새 대신 싸구려 기름의 냄새가 라디에이터에서 흘러나오고, 질이 좋지 않은 카펫에서는 잘 말리지 않은 빗물의 냄새와 언젠가 엎지른 커피의 냄새가 난다. 닫힌 창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냉기가 실린 약한 바람덕분에 집안 구석구석에서는 옅은 체취가 풍겼다. 약간의 땀 냄새와 비누의 냄새. 커피의 냄새와 약간의 가스냄새. 한데 뭉쳐두면 기분 좋은 집의 냄새가 된다. 그레이슨의 집은 그레이슨 같았다. 어디 하나 제대로 정돈 된 곳은 없어도 카펫 위에 떨어진 그레이슨의 흰 셔츠를 발로 차고 있다 보면 그레이슨이 등 뒤에서 안아주는 것처럼 몸이 따듯해진다.


 데미안은 비 냄새를 맞는 강아지처럼 허공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집 안에서 커피냄새 대신 옅은 기름냄새에 섞여 달착지근한 냄새가 났다. 그레이슨의 아파트에 어울리는 냄새는 아니지만 추위에 얼어있던 데미안의 기분이 노곤노곤 풀릴 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주전자를 불 위에서 내려놓던 딕이 뒤를 돌아 데미안을 바라보고는 다시 말 없이 고개를 돌린다. 딕의 집 안은 이제 반 이상 꽃에 파묻힌 꼴이 되었다. 완전히 파묻히진 않았지만 적어도 데미안이 이틀에 한번 꼴로 가져오는 꽃다발 덕분에 반 이상은 그랬다. 주워왔다고 하기에는 어설플 만큼 지나치게 싱싱한 꽃들은 적어도 완전히 마르는데 이주는 걸렸고 딕은 데미안이 ‘사 온’ 꽃다발들을 차마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데미안은 패트롤을 빙자해 딕이 집을 비운사이 테라스 난간에 골똘히 앉아 자신이 사다놓은 꽃다발이 없어지진 않았는지, 치워진 것은 없는지 곧잘 확인하고는 했으니 딕의 선택은 꽤 현명했던 셈이었다.

 딕은 따듯한 핫초코를 타서 데미안의 손에 꼭 쥐어주고 나서야 어설프게 웃었다. 오늘은 꼭 더는 주워오지 말라고 해야지. 아무리 가사에 소질이 없는 딕이어도 더 이상 집안에 꽃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는 것 정도는 눈에 띄게 분명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데미안에게 더 이상 꽃다발은 가져오지 말자고 말해야지 결심했던 것도 이미 일주일 전의 일이었지만 불퉁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내미는 데미안의 얼굴을 볼 때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도 이젠 분명히 말해야했다. 조금만 더 꽃다발이 쌓였다가는 꽃다발이 마르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집안이 정글이 되어 포이즌 아이비의 온실처럼 될지도 몰랐다. 아니면 딕이 직접 마른 꽃들을 내다 팔아야 하거나.

 

 

 “....해피 버스데이 그레이슨.”

 

 데미안은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있던 꽃다발을 들어서 이제는 빈손이 된 딕에게 건넸다. 추위로 얼어붙은 입이 축하를 전하는데도 약하게 떨렸다. 데미안은 두 손으로 완전히 머그컵을 감싸쥐고 핫초코의 냄새를 맡는다.

 

 “데미. 오늘도 주워온 꽃다발이야?”

 “...오늘은 산거야.”

 

 데미안이 아주 작게 툭 내던진 말에 딕은 팔에 힘을 주어 안고 있던 꽃다발을 심장께 가까이에 가져갔다. 무리다. 데미안에게 꽃다발을 가지고 오지 말란 말을 딕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좀 더 진작에 알아차리고 꽃병이나 잔뜩 사둘걸. 경찰서 동료가 이사하면서 필요없는 물건은 주겠다고 할 때에 꽃병으로 쓸만한거나 좀 달라고 할 걸 그랬어야 했다. 딕은 이제 소파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머그컵 안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데미안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나는 못해. 브루스는 몰라도 나는 안 돼.

 

 “얼른 안마시면 다 식을 걸?”


 딕은 카펫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무릎을 양 팔로 모아 안고는 미동도 하지 않는 데미안을 바라본다.

 

 “데미안.”


 브루스를 닮은 눈이 불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다가 딕은 입술을 한껏 끌어올려서 웃었다.

 

 “고마워. 올해는 데미안이 제일 먼저 축하해줬네. 브루스보다도 빨랐어.”

 “정말?”


 저럴 때는 영락없는 어린애인데. 브루스보다도 빨랐다는 소리에 데미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올리고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여주자 작은 입술이 만족감에 젖어서 고양이 입처럼 변하는 것을 보면서 딕은 데미안의 머리를 헝클었다. 애라니까.

 

 “애 아니라고!!!”

 “그래그래, 커피도 못 마시면서.”

 “마실 수 있어!!”

 “손에 들린 건 뭔데?”

 “이건 네가 준 거잖아!”

 “알피한테 물어본다?”

 

 데미안이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양이처럼 만족스럽게 웃더니 벌써부터 입이 나와서 눈썹이 진한 미간을 모을 대로 잔뜩 모아놓고 인상을 구기는 얼굴이 브루스를 닮아서 딕은 평소보다 더 소리내어 웃었다. 데미안은 손에 들려준 핫초코를 테이블에 내려놓기 무섭게 소파에서 뛰어내려 수화기를 붙잡고 있는 딕의 팔에 달려들었다.

 

“알피한테 지금 물어볼건데, 안 돼?”

 

대답 없이 팔에 매달려있던 데미안은 두 다리를 쭉 뻗어서 딕의 허리를 안았다. 숨쉬기가 힘들어 지는 걸 보니 대답은 이미 들은 것 같았다.


 



-

데미의 역키잡이 보고싶은데 더 이어서 못쓰겠더...버벅..버벅..

데미안 꽃집 븨아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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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딕팀] COLD CASE  (0) 201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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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딕팀] COLD CASE

from archive/DC 2014. 1. 24. 02:03

*팀딕/숲딕 (숲과 사귀는 딕과 딕을 짝사랑 하는 팀) + 포지션 없는 뎀팀뎀(?) 




 

입학식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한 딕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연말에는 경찰도 바빠지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던 브루스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날이 얼어붙기 시작하는데도 도시는 닥쳐오는 추위에 아랑곳 하지 않기라도 하듯 점점 더 소란스러워져 갔다. 파티도 많고 취객도 많은 때였다. 데이트 강간에는 어떤 약이 좋다느니 하는 시니어들의 주머니에서 하얀 가루들을 빼내 돌린 것도 티모시였기 때문에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래도.”

 

브루스가 말을 덧붙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소식이 뜸하기는 하구나.”

 

팀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창밖으로 설탕 가루 같은 흰 눈이 쌓이고 있었다. 고담의 겨울치고는 늦은 첫 눈이었다.

 

팀은 검게 코팅된 창밖으로 말없이 시선만 두던 브루스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적어도 브루스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브루스의 말이 단순히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한 번쯤은 딕에게 들러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는지 분간해내는 재주가 아직 팀에게는 없었다. 딕이라면 브루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을 텐데.


코트 위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털어내자 눈송이에 닿은 장갑 끝이 진한 색으로 물들었다. 일이 끝났을 시간인데 음주 단속에라도 불려나갔는지 야간 순찰에 나갔는지 그가 돌아오는 기척도, 집 안에서 나는 소리도 없었다. 눈이 올 줄 알았으면 목도리라도 두르고 나오는 건데. 물기로 물든 장갑 끝부터 손끝이 묵직하고 얼얼하게 얼어왔다. 오른팔을 깊이 구부려 장미꽃다발을 품에 안으면서 내어 쉰 입김이 한 겨울처럼 하얗다.

 

“팀?”

 

아마 그가 불러 세우지 않았다면 그즈음에서 포기해버렸을지도 몰랐다. 첫 눈이 오는 날은 그 풍경에 걸맞게 기온도 조금은 따듯해지는 줄로만 알았는데 첫 눈이 늦어진 만큼 바람도 추위도 예년의 배로 혹독했다. 사복 차림의 딕은 놀란 표정으로 한참동안 팀을 바라보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끼웠다.

 

“일단 들어와.”

 

딕이 문을 안으로 밀어 열자 미적지근한 실내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얼마나 밖에 있었던 거야?” “전화하지 그랬어.” 딕은 팀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그는 늘 대답 없는 동생들에게 익숙했다. 그 ‘동생’들 중에서 그나마 그의 목소리에 가장 많이 대답한 것이 티모시였을 만큼. 그만큼 딕은 없는 대답에 익숙했고, 대답이 없어도 늘 상냥했다.

 

대답이 없는 동안 딕은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주전자 물을 올렸다.

 

“팀, 커피?”

“응.”

 

“티미가 여기까지는, 별일 이네.”

 

딕은 말을 마치고 나서 얕게 목을 울려 웃었다.

 

“브루스는?”

“별 일 없어. 잘 지내.”

“고담에 가봐야 하는 거야?”

 

당장은 곤란한데. 딕은 여전히 엷게 웃는 얼굴로 머그잔에 물을 따랐다.

 

“팀?”

 

“티미. 무슨 생각해?”

 

 

 

 

“형. 생각보다 훨씬 차분하네. 피곤할 텐데.”

 

머그컵 안의 커피 알들을 티스푼으로 젓던 손이 멈췄다. 딕이 알기 쉬운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닐 것이다. 카울을 쓰지 않은 딕의 표정은 늘 정직했다. 늘 웃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읽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그리고 표정만큼 몸짓도 그랬다. 딕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고는 팀의 눈앞에 머그잔을 내밀었다. 손끝부터 젖어들어 쉽게 벗겨지지 않는 장갑을 힘겹게 벗어내고 머그컵을 받아들자 손끝이 벌겋게 물들었다. 딕의 눈이 손끝을 스쳐갔다.

 

“유니폼도 아니고. 무슨 일 있어?”

 

딕이 소파에 몸을 던져 앉자 낡은 소파가 팀의 엉덩이 밑까지 부드럽게 꺼졌다가 천천히 모양을 되찾았다. 딕은 팀에게, 데미안에게 늘 하듯 그리고 아마 제이슨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길고 날렵한 팔을 양껏 뻗어서 팀의 허리를 완전히 안고 어깨에 뺨을 기댔다. 딕의 몸짓에는 늘 손위 형제라고 하면 어디에 가서든 살가운 성격인 모양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애정이 담겨있었다.

 

“그게 팀.”

“말 해봐. 어차피 브루스한테 말 못하니까 그러고 있는 걸 거 아냐.”

 

같은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밝게 빛나던 눈을 딕은 아주 느리게 깜박이고 장난스레 웃었다.

 

“클락이랑 싸웠어.”

“클락 켄트?”

“그래. 우리 보이스카웃 씨 말이지.”

 

“리그에서 따로 볼 일도 없으면서 무슨.”


대체로 딕의 표정은 솔직한 편이었다. 팀을 끌어안은, 상체를 낮춘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들어 팀과 눈을 맞추는 딕의 표정은 어딘가 곤란해보였다. 팀이 딕의 표정을 읽느라 당혹해하는 사이 딕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떼어내며 숨소리 같은 웃음소리를 내어 웃었다.

 

“...저기 팀, 그러니까.”

 

팀은 여전히 시린 손으로 식기 시작하는 머그컵을 고쳐 쥐었다.

 

“브루스한테는 아직 말 안했지만 아마 알고 있을 것도 같고. 브루스는 브루스니까.”

 

딕은 답지 않게 천천히 말을 이으며 뜸을 들이다 손을 뻗어 팀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팀도 알게 되겠지만, 클락이랑 사귀고 있어. 두 달 전부터.”

 

 

 

“그냥, 좀 말다툼을 해서 그래. 별 일 아니야.”

 

“팀?”

 

팀, 아픈 거 아니야? 밖에 너무 오래있어서 감기기운이라든가. 티미. 딕은 손에 쥐고 있던 머그컵을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팀의 둥근 어깨를 손으로 감싸듯이 쥐어왔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앞머리를 쓸어넘기면서 한참동안이나 이마를 짚은 채로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는 딕의 가슴을 밀쳐 떨어트리고 나서야 팀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열 나는데?”

“추운 데 있다가 들어오면 누구라도 그래.”

“정말 괜찮아?”

“괜찮아.”

 

“아, 그리고 브루스한테는 말 하지 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알고 있어.”

“브루스라면 클락한테 당장에 날아 갈거야. 안 그래 보여도 은근 다정한 구석이 있으니까.”

“...알아.”

 

“정말?”

“그래.”

 

딕은 소리 없이 웃다가 다시 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소파에 완전히 몸을 묻었다.

 

“그러고보니 학교는 어때?”

“그냥...”

“고등학교 때랑은 많이 다르지?”

 

딕은 팀의 대답을 완전히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팀은 간단하게 고개만 끄덕였고 딕은 그런 팀의 머리를 쓰다듬다 고개를 빼고 소파 옆을 눈짓 했다.

 

“어느 여자야? 우리 티미한테 장미꽃을 얻어낸 게. 어디 들리던 참이었어?”

“형.”

“아, 물어보면 안 되는 거야? 응?”

 

딕은 그렇게 말하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브루스가 셀리나에게 배트맨의 정체를 밝혔노라고 했을 때처럼 아주 시원하고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티미가 벌써 여자한테 장미꽃을 주는 나이가 됐어.”

“아니야, 형.”

“브루스한테 주려고 산 건 아니잖아?”

 

딕은 더는 두고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웃었다. 얼굴 전체가 짓궂게 변하는 표정으로 이를 드러냈다가 팀의 허벅지 위에 가슴이 닿도록 팀을 가로질러 소파 밑에 내려놓았던 장미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한 서른 송이쯤 되는 것 같은데?”

 

딕은 그대로 팀의 허벅지를 베며 몸을 반 바퀴 돌려 돌아누웠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손에 들린 한아름의 꽃다발이 팀의 턱을 간지럽혔다.

 

“그 정도였던 것 같아.”

“서른 살 여자한테 반한거야? 브루스가 가만히 있지는 않겠는데.”

“딕, 아니야.”


딕이 깔깔거리고 웃을 때마다 몸이 흔들렸다. 팀을 올려다보느라 허리를 소파에서 띄우면 견갑골에 힘이 들어가면서 팔꿈치가 천천히 몸의 무게를 싣고 허벅지를 눌러왔다. 손에 들린 머그컵을 떨어트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팀은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아야했다.

 

“팀.”


“내가 꽃다발 만져서 기분 나빠졌어?”

“...아니야.”

“누구 주려고 산 걸 텐데.”

“형 가져.”

 

딕은 굳어있는 팀을 올려다보다 팀을 달래듯 손바닥으로 팀의 무릎을 느리게 도담였다. 독한 연고를 바른 것처럼 무릎안쪽부터 뼈가 더워진다.

 

“혹시 약속 취소 됐어? 그래서 그래?”

 

팀의 허벅지를 손으로 딛고 딕은 몸을 일으켰다. 딕의 가슴과 팀의 배 사이에 놓인 꽃다발의 포장지가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팀. 티미 형 좀 봐. 티임. 딕의 손가락이 잔머리칼이 난 앞머리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귓가로 내려갔다가는 이마 위를 덮은 머리칼들을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겼다.

 

“기분 상했어?”

“그런 거 아니야.”

“팀.”


“안 상했어. 형 집이 늘 이 모양이길래 사온거야.”

 

그거라도 있으면 덜 형편없어 보일 것 같아서. 딕은 팀의 말에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다 혀를 내두르고 웃었다. 전보다는 진전이 있기는 했으나 완전히 시트가 뒤집힌 침대며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나간 트레이닝 복, 발치에 떨어진 카울까지 팀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가 될 만한 수준이었다.


“정말로?”

“....그래. 여자 같은 것도 없어. 아직 입학한지 세 달 밖에 안 지났어.”

“...세 달이면 충분하지 않아?”

“형한테나 그렇겠지.”

 

“정말 고담에 안 가봐도 되는 거야? 그래서 온 거 아니지?”

“그랬으면 리그에서 호출했겠지.”

 

딕은 파란 눈으로 한참동안 꽃다발을 바라보다 다발을 머그컵 옆에 내려놓았다. 팀을 향해 몸을 틀고 회색 코트 위로 얼굴을 묻었다가는 팀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보이는 한 쪽 눈으로만 얄상하게 웃는다.

 

“너 보니까 집에 가고 싶다.”


피곤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는 딕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면 가족을 떠올리는 딕에게, 사소한 말다툼에 진지하게 힘들어할 만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연애의 형태를 띤 것을 하고 있는 그에게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고작 두 달이지만 그만큼 늦된 것은 팀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입학하면, 입학하고 자리를 잡으면, 자기 자신에게 조금씩 시간의 유예를 허락한 것은 팀이었다. 팀과 데미안을, 그리고 이따금 나타나는 제이슨까지 딕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동생들로서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쉽게 어떤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한겨울이 되고 나서야, 브루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불현 듯 이제는 찾아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너무 늦었다.

 

“데미안이 보고 싶어 해. 말은 안 들어도 형 이야기만 나오면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바로 피할 거면서.”

 

딕은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태어나서 자란 과정만큼이나 보통이 아닌 동생이었지만 딕의 말에는 툴툴거리면서도 결국은 어린아이가 되고 마는 데미안을 브루스도 알피도 알았다. 좋아하고 있다는 말 대신 데미안이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꺼내는 쪽이 훨씬 쉬웠다. 입술이, 그리고 입 주변의 근육이 멈추지도 얼어붙지도 않았다. 망설일 필요가 없는 대화들은 으레 그렇게 훨씬 더 간단하고 쉬운 법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된 줄로만 아는 꽃다발을 돌아보던 딕은 꽃 한 송이를 빼어 들어서 줄기 중간을 꺾고 팀의 코트 윗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피나.”

“응?”

“거기 가시에 찔렸다고.”

 

팀은 아직 남은 줄기를 쥐고 있는 딕의 손목을 쥐었다. 찬 손이 손목에 닿자 어깨가 움츠러든다. 너무 많은 통각에 익숙해져서인지 무디게 팀의 얼굴만 바라보는 딕의 손가락에 입술을 가져갔다. 한 방울이 사라지면 겨우 한 방울 베어 나오는 상처를 혀로 가만히 핥는 사이 눈이 마주쳤다.

 

“...저기 팀.”

 

팀은 고개를 들지 않고 눈커풀을 위로 들어올려 반이 가려진 눈동자로 딕을 바라본다.

 

“간지러운데.”

“찔린 건 모르면서 간지럽기는 해?”

 

그은 팀의 입술에 물려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비틀어 빼냈다. 타액과 섞여 얼룩져 번진 손가락으로 핏방울이 번진 팀의 입술을 문질러 닦고 손가락에 남은 얼룩을 닦아 내듯이 엄지를 입술 사이에 물었다.

 

“형.”

 

응? 입안에서 공기가 먹힌 소리가 막힌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어디가서 그러지 마.”

 

‘그런’ 게 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표정으로 팀을 보며 말없이 눈만 깜박이던 딕은 곧 눈을 접었다. 응. 팀 말 들어야지.

 

“...정말로 그러지 말라니까. 지금도 뭘 그러지 말라는 건지는 알아?”

“하하....하...”


말 없이 웃기만 하는 딕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가까이에서 전화 벨이 울렸다. 코트의 주머니 위를 더듬었지만 팀의 것은 아니었다. 딕은 팀의 얼굴과, 팀의 빈 두 손과 코트를 번갈아 보고는 놀란 듯 상체를 일으켰다. 스프링이 고장 난 소파에 완전히 파묻혀있던 날렵하고 단단한 몸이 아크로바틱하게 튀어 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형.”

“잠깐만.”

“받지 마.”

“응?”

“잠깐만 팀.”

 

클락?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딕이 얕게 울대를 울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를 등지고 주방의 벽면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대고 한 마디 내뱉을 때 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것이 부끄럽기라도한지 딕은 벽에 머리를 콩콩 찧었다. 희고 균형 잡힌 발이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형.”

 

딕은 눈앞에 눈을 떼기 힘든 사람이라도 서 있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전화 지금 받아야 돼?”

 

아니에요. 휴대폰 너머의 상대가 무어라고 이쪽을 걱정하는 말을 했겠지. 보이 스카웃이 다정한 사람이라는 건 모두가 알았다. 아마 그렇게나 리처드를 감싸고 도는 브루스도 클락 켄트라면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괜찮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는 딕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팀은 테이블 위에 놓인 꽃다발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좀 더 늦을 걸. 코트 윗 주머니에 꽂혀있던 꽃을 빼내 딕이 내려둔 머그컵에 조심스럽게 꽂았다. 밑동이 짧았는지 꽃받침이 채 머그잔 위에 고스란히 걸리지 못하고 못 다 마신 커피 속으로 빠지는 꽃을 바라보다 팀을 옷깃을 여몄다. 물기에 젖은 손가락들이 장갑 채로 얼어붙던 바깥 날씨보다도 소파를 등진 등을 바라보는 것이 몸에 한기가 들었다.

 

“갈게.”

 

딕은 팀을 바라보며 눈썹만 치켜 올렸다.

 

“집이 춥네. 히터 좀 틀어.”

 

딕의 맨발이 푹신한 러그 바닥을 디딜 때 마다 발끝에서 나는 사뿐한 바람소리와 무용수처럼 핏줄이 불거져 모양이 잡힌 발을 좋아했다. 딕은 소리 없이 현관 문 앞까지 나와 걸쇠를 풀어주다 밖에서 불어오는 한기에 짧은 반팔 티셔츠 아래의 팔을 손으로 감쌌다.

 

“주말에 집으로 갈게. 미안해.”

“신경 쓰지 말고. 그 전화나 잘 받아.”

 

디키? 휴대폰 너머로 듣기 좋은 클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브루스만큼이나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였다. 잠시만요, 클락.

 

“형.”

“응.”

“브루스한테 말 안 할테니까 걱정 마.”


거기 팀이니?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를 아랑곳 않고 팀은 곧게 딕의 파란 눈을 응시했다. 고마워.

 

“그리고 다음부터는 연애가 바빠도 집에는 들러.”

“.....응.”


“갈게.”

 

딕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자 그는 놀란 듯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다음부터 슈퍼맨 전화는 나 없는 곳에서 받아.”

 


갈게. 히터 좀 올려 딕. 딕은 맨 발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밟으며 문 밖까지 따라 나섰다. 얇은 흰색 반팔 셔츠 아래로 소름이 돋은 팔을 손바닥으로 겨우 부비면서 추위에도 애써 웃는 딕을 바라보다 팀은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그래서요 클락. 등 뒤에서 그의 통화가 이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딕의 목소리는 늘 다정했는데에도 그만큼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깨 위에 내려앉던 설탕가루 같은 눈송이처럼. 딕의 목소리도 내려앉았다가는 짙은 물자욱을 내고 사라졌다.


 

 

 

 

 

“야 드레이크. 왜 이제 들어와?”

 

데미안은 울새처럼 차려입고 웨인 저의 저택 입구에 크게 세워진 석상 위에 앉아있었다.

 

“패트롤 갈 시간치곤 너무 이르지 않아?”

“네가 무슨 상관이야.”

“됐다.”

 

데미안을 향해서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다가 문득 코트의 앞주머니를 쓸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클락 켄트의 전화를 받는 딕의 목소리를 들으며 괜한 화풀이를 하지 말 걸 그랬다. 가시 어디쯤에 그의 피도 묻어 있었을텐데. 딕이 꺾어준 꽃이었는데.

 

“바아보. 얼굴 옆에 붙은 거 얼어서 떨어져도 히어로는 할 수 있냐?”

 

데미안은 두 팔을 팔짱 끼고 팀을 바라보다 코웃음쳤다. 카울 뒤에서도 영악한 웃음기로 일그러진 얼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데미안의 목소리에 빨갛게 얼어붙어서 감각이 없어진 귀를 손으로 감싸는 사이 눈앞이 컴컴해졌다.

 

“야!”

“누가 그러게 바보 같이 굴래?”

 

간지럽게 눈커풀을 뒤덮은 검은 천을 걷어내어 들여다보면 아마 목도리 비슷한 것이었던 것 같다. 누가 브루스 친아들이 아니랄까봐 눈 깜박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 들어가며 아이의 체온으로 덥혀진 목도리를 목에 두르는 동안 웨인저에서 정문까지 조그맣게 찍힌 아이의 발자국이 보여, 팀은 마치 딕에게서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엷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발자국 크기만큼은 애 같았다.


“성격까지 브루스 같아 가지고는.”

 


-

2차 창작 되게 오랜만인듯 8ㅁ8...팀은 청초하고 조용하면서 이성적인게 매력이라고 생각해요...ㅠㅠ크고 나면 좋아하는 느낌의 이지적인 스타일의 회색 코트가 잘 어울리는 (지금도 잘어울리지만) 남자가 되지 않을까. 버버리 서류가방을 들려주고싶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딕은 로빈일 때도 나위일 때도 경찰일 때도 다 좋은..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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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항구에서 출발한 배는 오래도록 서녘을 향해 나아갔다.

머리 위에서는 수부 에아렌딜의 배가 수차례나 하늘을 가로질렀고 엘론드는 몇 번이나 아버지의 별이 뜨고 졌는지 셈하기를 그만 두었던 차였다. 가운데 땅은 멀어져 요정의 눈에도 회색 항구가 보이지 않게 될 무렵에, 반지의 주인 되는 요정들은 반지의 빛이 꺼져감에 따라 그들이 얼마나 아만 땅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지를 가늠했다. 그들은 이제 영주도, 안주인도 아니었다. 다스려야할 요정도 다스릴 영지도 없는 요정 영주들의 힘을 잃은 반지는 별빛에 닿을 때에만 이따금 빛이 일렁거렸다.

 

다스려야할 요정은 이미 가운데 땅을 떠났고 다스려야할 영지도 가운데 땅에 남아 반지는 가운데 박혀있는 푸른 보석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쓸모도 없는 물건이 되었으나 그는 긴 여행 내내 손에 걸린 반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드, 엘론드! 손가락이 아홉 개인 호빗이 그렇게 외쳤을 때에서야 엘론드는 반지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가까워지는 해안선을 응시했다. 임라드리스의 흰 깃발을 가지고 떠난 요정들이 가지고 떠났던 깃발을 들고 배를 맞이하고 있었다. 뱃머리에 조각된 백조의 날개는 긴 여행의 풍파로 날개 끝이 닳아 없어졌을 즈음이었다.

! 로드 엘론드의 탄성을 빼앗아 간 것은 로스로리엔의 여군주였다. 엘론드는 그녀의 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요정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먼 곳에서, 반지에서 눈을 떼어 해안선을 바라보았을 때부터 엘론드가 말도 숨도 내뱉지 못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점이었다.

 

장신의 거구, 말 한마디 없이도 느껴지는 위압감을 뒤로하고 그의 표정은 말 할 수 없이 온화했다.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아만에서 가장 작은 키를 가지고 있게 될 두 호빗에게 손을 뻗어 배에서 내려주고는 엘론드에게 손을 뻗었다.

 

너무 늦었구나, 페레델.”

 

로드 엘론드를 페레델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가운데 땅에 없었다. 길갈라드가 가운데 땅을 떠나기 전에도 엘론드를 반요정이라는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요정도 놀도르의 마지막 대왕뿐이었다. 비록 마에드로스 형제의 손에 자라난 소년에 불과했을 때에도 엘론드 형제의 피 안에 들어있는 모든 혈통과 모든 계보에서 오는 영광과 슬픔을 반요정이라는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위엄을 가진 사람은 고작해야 길갈라드 뿐이었다.

 

전하께서 너무 일찍 떠나신 겁니다.”

 

채 배에서 내리지 못한 요정들을 대신해 길갈라드는 엘론드를 재촉했다. 고스란히 반지가 끼워진 손을 당겨 발라와 엘다르의 땅 위에 반요정의 두 발이 디뎌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놀도르의 젊었던 왕의 입가에 느리게 미소가 번져나갔다. 인간의 시대를 배웅하여 그 다리를 건네어 주고 온 엘론드가 젊은 페레그린 툭처럼 여겨져도 이상할 것 없는 곳이 아만이었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그의 대왕은 여전히 젊었고 여전히 온화하게 웃었으며, 페레델의 손을 잡듯 여전히 큰 손으로 엘론드의 손을 쥐었다.

 

임라드리스의 흰 깃발. 아르웬을 앞세워 보냈으나 결국 그의 딸만이 필멸이 되어 돌아온 여행에서 먼저 떠난 요정들이 임라드리스의 길고 흰 깃을 내세워 앞섰다.

 

드디어.”

 

탄식처럼 엘론드가 말을 내뱉었을 때 길갈라드는 고개를 꼿꼿이 세워 흰 깃을 보고 있었다. 마에드로스 형제의 손에서 구해내 작기만 했던 반요정 페레딜의 깃발. 깃은 엘론드 만큼 희었고 그가 뜻하는 만큼 은은하게 반짝였다. 요정의 기술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반짝이지 못했을 깃발이었다.

 

맡기신 것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갈라드 그가 가운데 땅을 떠나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아만의 시간은 모호하기만 했다. 시절처럼 이미 겪을 수 있는 모진 비극을 다 겪은 요정과 신의 땅은 태초에 엘다르 만이 있었던 아르다처럼 온유하고 아늑했다. 삶이 무던할수록, 길갈라드가 겪은 모든 전쟁에 비할수록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시간은 모호하고 느리게 흘렀고 길갈라드는 그것을 알고서도 셈하지 못할 만큼 오랫동안 마지막 배를 기다려 왔을 것이었다. 길갈라드는 페레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분명 갓 어른이 되었을 때 건넸던 빌랴는 수차례의 전쟁과 고초로 주름지고 다져진 완연한 요정의 손에 끼워져 있었다.

 

돌려줄 것 없다.”

전하.”

내가 아니라 네가 가지고 돌아 온 것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겠지.”

 

오히려 짐을 맡기고 떠나 미안했다는 말은 차마 건네지 못했다. 그것을 언젠가 돌려주어야하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탑의 눈에서 감추고 지켜왔을 반요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수많은 요정들 중에 드물게 앞을 보는 재능을 가진 젊고 어린 반요정이 놀도르의 대왕조차 떠나게 만든 가운데 땅의 풍파 속에서 얼마나 위태롭게 견고한 벽을 쌓아 올렸는지도 몰랐던 바가 아니었다. 칼을 들면서도 치유사라고 불리워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타고난 핏줄로 인해 치유해야할 것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지막 배로 돌아온 반요정에게 차마 지나간 일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길갈라드는 느리게 상처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은 엘론드의 손등을 쓸다 힘을 주어 손을 쥐었다. 요정의 행렬은 여전히 희고 푸른 깃발을 세우고 아만 한 가운데 요정들의 터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페레델.”

예 전하.”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에서는 더 이상 전하라고 불러선 안 될 거야. 가장 높은 요정왕도 발라도 계신 곳에서 감히 내가 전하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길갈라드는 반요정의 손을 꼭 쥐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음악으로 흘러넘치던 린돈의 도시를 산책하던 때처럼. 아이의 손은 성인의 것 이상이 되었고, 그의 반요정은 젊다고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땅의 현자와 비슷한 것이 될 만큼 시간이 흘렀으나 손만큼은 여전히 길갈라드의 한 손안에 쥐이고도 남을 만큼 작았다. 신다르와 인간의 피가 섞인 엘론드가 놀도르의 마지막 대왕이었던 요정보다 기골이 장대해질 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면.”

 

그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그의 페레델을 돌아보고 웃었다.

 

알면서 뭘 묻나.”

 

에레이니온.”

 

그 오랜 세월의 그리움을 뒤로하고도 조용히 짓궂은 웃음을 짓기 만 했던 장신의 요정은 드디어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엘론드와 길갈라드를 에워쌌던 요정들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아만에서만큼은 여전히 젊고 어린 놀도르의 마지막 청년왕을 뒤돌아봤다. 로스로리엔의 마님이 뒤를 따르다가는 소리 없이 웃었다.

 

 

엘론드. 잘 돌아왔다.”

 

나의 페레델! 가운데 땅에서 태어난 요정 가운데, 가운데 땅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요정 영주는 아만에 닿아서야 비로소 젊은 청년 왕의 젊은 책사로 돌아갔다. 필멸의 삶을 택한 운도미엘도 사냥감을 찾아 헤메이느라 목 축일 새 없는 그의 아들들의 생각도, 그의 왕 곁에선 젊은 책사로 돌아갔을 때에 만큼은 얼마간 잊을 수 있었다. 청년왕은 여전히 온화했고, 반요정의 손에는 왕이 물려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며 임라드리스의 깃은 여전히 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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