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엘론드.
1.
너는 또래보다 반 뼘이나 작았지. 너보다 큰 아이들도 나만한 아이들도 많았지만 너만큼 반 뼘이나 작은 아이는 없었다. 어깨까지 오는 짧은 단발을 늘어트리고 너는 또래 사이에 끼지 못하는 채로 성의 그늘에서 책을 읽고는 했다. 움츠러든 어깨, 겁에 질린듯한 표정. 너에 대한 소문은 온 왕국에 파다했다. 페아노리안 형제에게 자란 아이들. 네가 어떤 사람들의 곁에서 어떤 고달픈 밤과 어떤 고달픈 길을 떠돌아다녔는지에 관심이 있는 요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폐허가 된 왕국이 가슴속에 있었고 요정의 노래는 큰 파도처럼 작은 아이들에게도 흘러들었다. 네 입술 사이로 이제는 쓰지 않게 된 퀘냐의 흔적들이 굴러떨어질 때마다 아이들은 너에게서 걸음을 물렸다. 얼마간은 그 영문도 모를 적대감이 아픈 듯 한껏 어깨를 움츠리던 네가 어느 날 입술을 꾹 깨물고 괜찮다는 듯 책을 쥔 작은 주먹에 힘을 주었을 때, 어린마음에 문득 그것이 보기 싫다고 생각했지. 반 뼘이나 작은 네가 한껏 상처받아 울상이 된 표정으로 작은 입술을 꾹 다문 표정이, 그리고는 아이들이 뛰놀던 뜰에 모습을 비추지 않게 된 것이.
나는 종종 네가 좋아하던 그늘을 찾아갔다. 너는 책장을 넘기다 문득 서늘하게 지는 그늘에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지. 너와 두 아이는 더 앉을 수 있을 법한 거리를 벌리고 계단의 끝과 끝에 앉아서 이야기를 건네면 너는 몹시도 놀라고도 귀찮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네 아다 이름은 뭐야? 나나는? 말을 걸때마다 파드득 떠는 어깨가 좋았다. 입술을 꾹 여미어 닫은 표정 대신 얇고 고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입술을 달싹이면 나는 웃음을 겨우 걸어잠그고 뻔뻔한 표정으로 너를 돌아봤다. 턱을 괴고 네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 너는 대화에 익숙치 않은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애써, 빠른 대답을 쏟아낸다.
이따금 너는 내 이야기에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리고 대답들이 생각나지 않는 다는 것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글썽였다. 네게서 누군가가 빼앗아버린 것에 불과한 것인데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미안하기라도 한 양. 그리고는 책에 눈물방울이 떨어질라 허겁지겁 책을 덮고 등 뒤로 숨기면서 내가 나빴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던 것이다. 그 때 네가 울음이라도 터트렸다면 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품으로 작은 너를 안았을텐데, 너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부쩍 자랐지. 내가 너에게서 떨어져 앉는 거리도 점점 줄었다. 너는 늘 손에 책을 들고 있었는데, 그때가 되도록 장서관 안에 네가 읽지 못한 책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내게 배움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었고 나는 네 곁에 앉아 따스한 볕에 낮잠을 청했다. 그 작은 계단 위에 몸을 뉘이기 쉽지 않을 만큼 커졌을 때에는 너는 적당한 나무 아래에 새로운 터를 잡았지. 나를 위한 일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간밤의 아버지의 꾸짖음에 피곤에 지쳐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지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너는 다 읽은 책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두고 가만히 거기에 앉아있었다. 이따금 너는 자라난 들풀을 뜯어 내 머리위에 올려두고, 소매의 단추 위에 줄기를 둥글게 말아 꽃을 꽂아두고는 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서슴없이 자라던 너는 아름다웠지. 여전히 너는 나보다 반 뼘이나 작았다. 네 손에 네 마음만큼 따스한 치유자의 힘이 깃든 것을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네 다리 위에 머리를 올려두고 네 손을 그 위에 얹으면 단 낮잠에 악몽이 도사리는 일은 없었다. 너는 여문 손놀림으로 등허리를 덮는 내 금발을 엮어 꽃을 꽂아두고는 했다. 일어날 때마다 내가 미간을 좁히며 쑥스러워할 것을 알면서도. 너는 나를 앉혀두고 겨우겨우 터지는 웃음을 죽인 얕은 목소리로 웃으며 차근차근 네가 땋아놓은 머리를 풀어주었다.
좀 더 오랫동안 그런 너를 볼 수 있을 줄로만 알았지.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분의 말에 묻어있던 그 분노들, 혐오들과 통탄들에서 내가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했다. 좀 더 오랫동안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빗처럼 내 머리를 빗어 내리던, 곤히 잠든 내 곁에 얼굴을 마주 보고 누워선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던 너를 좀 더 아껴서 눈꺼풀 뒤에 박아두었어야 했는데.
2.
우리가 헤어져도, 우리가 겪은 그 수많은 일보다 아프지는 않을 거야.
너는 가만히 흰 나무의자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그 드넓던 린돈은 와해되어 저물어가고 너의 새로운 왕국은 고요함과 너를 닮은 흰 빛으로 계곡과 계곡사이를 빼곡히 메꾸고 있었지. 또래보다 반 뼘이나 작던 어린 시절의 너는 나긋한 몸가짐의 청년이 되었다가 이제는 임라드리스를 너의 팔 안에 가득 에워싸고 이별을 입에 담았다. 너는 신중하고 지혜로웠지만 언제나 나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내게 네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겪은 그 모든 일만큼, 어쩌면 그 모든 일보다도 아플 것이었는데.
너는 알고 있었을까, 몰랐던걸까. 아니면 알고도 외면해야했을까.
네 표정은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의 것인 양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가느다란 너의 턱선을 눈으로 훑으면 내 시선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의 시선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너는 결심이 선 듯 한 얼굴로 가만히 내 손끝을 만졌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이나 내 손끝을 더듬는 너를 그대로 두었다. 너의 손끝에서는 여전히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졌음으로.
나는 네게 그런 결심을 서게 한 것들을 얇은 강바닥 아래로 비쳐 보이는 조약돌처럼 내려다볼 수 있다. 우리는 많이 잃었고, 아마도 너는 더는 잃지 않을 무언가를 견고히 쌓아올리고 싶었겠지. 너의 작은 왕국이 느리게 그러나 확연하게 봄의 녹음처럼 번져나가는 동안 너는 그 사실을 점점 더 깊이 느끼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네 곁에 있을 수 없는 내가 아니라 너를 더 견고한 성채로, 너를 임라드리스의 영주로 만들어줄 부드러운 한 겹의 웃옷을 바라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너는 내가 정말로 네 성혼식에 참석하리라고 여기고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것조차 보내지 못할 사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혹은 네게 재차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네가 성혼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 나는 갈리온이 놀랄만큼 웃었다. 너는 그렇게 너를 임라드리스의 영주로 만들어줄 부드러운 한 꺼풀의 웃옷을, 비단처럼 아름다운 무게중심을 찾았다는 것을 내게 알렸다.
내게 그저 알리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마간은 했다.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 먼거리에서 늘상 그런 것들을 공유하던 사이였음으로. 나는 너의 영지에 몇 그루나 되는 꽃나무가 있는지 얼마나 넓은 들판이 있으며 네 성채에 몇 개나 되는 방들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내게 한 겹 우아하게 너를 덮어줄 비단이불 같은 무게중심을 찾았다는 편지를 보냈다. 다를 바는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어느 해에는 네 앞뜰의 어떤 꽃이 피지 않았는지, 네 잠자리가 사납지는 않은지 알고 지냈다. 그 뿐이었다. 나는 본래 그랬듯 내게 남은 그 거대하고 울창한 숲을 뒤로하고 언제든 네게 달려갈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너 또한 그랬다. 너는 너 자체로 견고해져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그늘처럼 부드럽고 온유하던 너를 견고히 다져놓은 것은 그 간의 세월과 점차 자라나는 너의 아이들과 너의 곁에 있던 이였겠지. 나는 그저 너의 글씨에서 너의 목소리로 별의 이름을 딴 세 아이의 이름을 들었다.
3.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너의 말투는 그간 많이도 변했었는지, 너는 내게 정말로 놀란 듯이 그렇게 물었다. 네가 여기에는 어떻게. 그렇게 묻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너는 어른스러운 말투로, 이제는 여리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청년의 말투와 목소리가 남아있지 않은 현자의 말투로 내게 물었다. 떠난다기에.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너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떠난다기에. 재차 확인하듯 또렷하게 묻는 말에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럴 때도 됐다고 생각했지.
떠날 때가?
네가 또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말했을 때 너의 표정을 너는 알고 있을까. 너는 상처받기라도 한 듯이 나를 돌아봤다. 그말이 정말 네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까. 눈썹이 일그러트리면서 너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 짧은 찰나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던 예전의 너를 찾아내고 나는 미소를 띤다.
너는 이미 내게서 한 번 떠난 사람이었다. 결심이 굳은 얼굴을 한 주제에 떨리는 손끝으로 내 손마디를 차분히 더듬으며 너는 내게 이별을 이야기했다. 나는 한 번 네가 떠나감을 받아들였다. 상처받기라도 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너를 바라보다 나는 손을 뻗어 네 뺨을 더듬는다.
그때의 네가 그랬듯 결심은 섰으나 떨리는 손으로.
농담이야. 소문으로 들었지.
자네는.
네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자네는.
남을걸세.
남을거야. 네가 다시 묻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말을 더한다.
어째서.
늘 자네만 날 애태워서는 내가 억울하니까.
너는 정말로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이내 조용히 달싹이던 입술을 멈췄다. 그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도 내가 보고싶어하지 않던 입술을 안쓰럽게 매어 문 표정으로. 너는 그 순간에 네가 내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헤아리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말했던 것과 내가 받아들인 것이 같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차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나의 헤어짐은 우리가 겪은 그 수많은 일보다 아팠다는 것을. 내 상처를 헤아리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된 순간 더할나위 없이 상처받았겠지. 괜찮다. 나는 네가 고작 그 정도로 쓰러지거나 날아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별을 겪고 다시 상처를 입으며 여기까지 왔으니까.
기다려봐 내가 언제쯤 돌아갈는지.
너는 말없이 떨리던 내 손을 쥐었다가 곧, 그 어디에라도 그 밤에도 핀 꽃이 거기에 있다면 예전처럼 내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아줄 것만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잘 가게. 적어도 내가 여기에 남아있는 동안은 네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는 살피고 있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나는 흔한 포옹도 입맞춤도 없이 너를 배웅했다. 깊은 밤에. 네가 떠나는 회색항구에서도, 빛나는 너의 환송식에서도 아닌. 마치 내가 아버지를 따라 린돈에서 떠나던 날의 밤처럼. 너는 한참이나 말없이 내 손을 쥐고 손끝을 더듬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너의 손끝이 그리는 언어는 너의 퀘냐보다도 훨씬 정직하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이나 내 손끝을 더듬는 너를 또 다시 그대로 두었다.
0.
우리는 시간 속에서 별처럼 늙어갔다. 한 때는 푸른 별이었다가 붉게 타오르며 나이를 먹어가는 별처럼.
요정의 삶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니었음으로 괜찮으리라고 여겼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들이 그 길고 긴 시간을 넘어 너무 자주 찾아오지 않더라도 괜찮으리라고. 우리는 별처럼 긴 시간을 두발로 버티고 살아있으리라고.
우리는 시간 속에서 별처럼 늙어갔다. 긴 시간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영생을 삶으로 하는 우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 우리는 영생을, 삶을 과신했는지도 모른다. 에다인의 삶과는 다르게 우리의 시간은 언제든 처음처럼 돌아오는 것이리라고.
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바다에 나가본 적은 어린 시절 이후로 내게 없었다. 청년이었던 너와 손을 붙잡고 아무도 없는 그 들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던 때를 제외하면. 배를 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아버지의 왕국은, 그리고 나의 왕국은 깊은 숲 안에 존재했다.
배를 탄다는 것이 고된 일이 아님을 빈다. 서녘으로 가는 너의 마지막 여행조차 고되지는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음으로.
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1.
네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구로부터 어떻게 도달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네가 탄 배가 여기에 닿기까지, 나는 그것이 얼마나 걸릴까 손을 꼽아 생각한다. 이곳의 하루들은 충분하고 풍족하여 낮과 밤의 경계도 날과 날의 경계도 온통 흐리다. 온유한 양수에 감싸인 양 나는 현자도 치유자도 아닌 별의 계보 끝자락의 어떤 요정으로 돌아와 너를 기다린다.
너의 배가 순풍에 휩싸여 그 먼 길을 하루처럼 돌아오기를. 너는 고단하겠지. 나는 오래도록 네가 그 고단한 세월을 혼자 견디도록 너를 두었다. 네가 돌아오면 잠든 네 머리칼을 손끝으로 천천히 빗어내던 그 여름날처럼 너를 쉬이게 할 수 있을까.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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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합작에 제출했던 글. 제목은 달리 정할게 없어서. 요즘 자주듣는 Manhattan을 BGM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