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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스란엘] 관제탑 2014.03.23
  3. [길엘] 이제는 2014.03.17
  4. [길엘] LITM 2 2014.02.25
  5. 길엘 단문 2014.02.25
  6. [스란엘] The Gaslight Anthem 2014.02.13
  7. [길엘] Buuvein, Buuvein. 2014.02.02
  8. [길엘] 귀향 2013.12.30
  9. [길엘] 롤리타 2 3 2013.06.13
  10. [길엘] 롤리타 1 4 2013.02.07

[스란엘] 무제

from archive/Tolkien 2014. 3. 31. 20:09


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엘론드. 



1.

 너는 또래보다 반 뼘이나 작았지. 너보다 큰 아이들도 나만한 아이들도 많았지만 너만큼 반 뼘이나 작은 아이는 없었다. 어깨까지 오는 짧은 단발을 늘어트리고 너는 또래 사이에 끼지 못하는 채로 성의 그늘에서 책을 읽고는 했다. 움츠러든 어깨, 겁에 질린듯한 표정. 너에 대한 소문은 온 왕국에 파다했다. 페아노리안 형제에게 자란 아이들. 네가 어떤 사람들의 곁에서 어떤 고달픈 밤과 어떤 고달픈 길을 떠돌아다녔는지에 관심이 있는 요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폐허가 된 왕국이 가슴속에 있었고 요정의 노래는 큰 파도처럼 작은 아이들에게도 흘러들었다. 네 입술 사이로 이제는 쓰지 않게 된 퀘냐의 흔적들이 굴러떨어질 때마다 아이들은 너에게서 걸음을 물렸다. 얼마간은 그 영문도 모를 적대감이 아픈 듯 한껏 어깨를 움츠리던 네가 어느 날 입술을 꾹 깨물고 괜찮다는 듯 책을 쥔 작은 주먹에 힘을 주었을 때, 어린마음에 문득 그것이 보기 싫다고 생각했지. 반 뼘이나 작은 네가 한껏 상처받아 울상이 된 표정으로 작은 입술을 꾹 다문 표정이, 그리고는 아이들이 뛰놀던 뜰에 모습을 비추지 않게 된 것이. 

 나는 종종 네가 좋아하던 그늘을 찾아갔다. 너는 책장을 넘기다 문득 서늘하게 지는 그늘에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지. 너와 두 아이는 더 앉을 수 있을 법한 거리를 벌리고 계단의 끝과 끝에 앉아서 이야기를 건네면 너는 몹시도 놀라고도 귀찮은 표정으로 나를 봤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네 아다 이름은 뭐야? 나나는? 말을 걸때마다 파드득 떠는 어깨가 좋았다. 입술을 꾹 여미어 닫은 표정 대신 얇고 고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입술을 달싹이면 나는 웃음을 겨우 걸어잠그고 뻔뻔한 표정으로 너를 돌아봤다. 턱을 괴고 네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 너는 대화에 익숙치 않은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애써, 빠른 대답을 쏟아낸다. 

 이따금 너는 내 이야기에 대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리고 대답들이 생각나지 않는 다는 것에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글썽였다. 네게서 누군가가 빼앗아버린 것에 불과한 것인데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미안하기라도 한 양. 그리고는 책에 눈물방울이 떨어질라 허겁지겁 책을 덮고 등 뒤로 숨기면서 내가 나빴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던 것이다. 그 때 네가 울음이라도 터트렸다면 나는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품으로 작은 너를 안았을텐데, 너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부쩍 자랐지. 내가 너에게서 떨어져 앉는 거리도 점점 줄었다. 너는 늘 손에 책을 들고 있었는데, 그때가 되도록 장서관 안에 네가 읽지 못한 책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내게 배움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었고 나는 네 곁에 앉아 따스한 볕에 낮잠을 청했다. 그 작은 계단 위에 몸을 뉘이기 쉽지 않을 만큼 커졌을 때에는 너는 적당한 나무 아래에 새로운 터를 잡았지. 나를 위한 일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다만 간밤의 아버지의 꾸짖음에 피곤에 지쳐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지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너는 다 읽은 책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두고 가만히 거기에 앉아있었다. 이따금 너는 자라난 들풀을 뜯어 내 머리위에 올려두고, 소매의 단추 위에 줄기를 둥글게 말아 꽃을 꽂아두고는 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서슴없이 자라던 너는 아름다웠지. 여전히 너는 나보다 반 뼘이나 작았다. 네 손에 네 마음만큼 따스한 치유자의 힘이 깃든 것을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네 다리 위에 머리를 올려두고 네 손을 그 위에 얹으면 단 낮잠에 악몽이 도사리는 일은 없었다. 너는 여문 손놀림으로 등허리를 덮는 내 금발을 엮어 꽃을 꽂아두고는 했다. 일어날 때마다 내가 미간을 좁히며 쑥스러워할 것을 알면서도. 너는 나를 앉혀두고 겨우겨우 터지는 웃음을 죽인 얕은 목소리로 웃으며 차근차근 네가 땋아놓은 머리를 풀어주었다. 

 좀 더 오랫동안 그런 너를 볼 수 있을 줄로만 알았지.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분의 말에 묻어있던 그 분노들, 혐오들과 통탄들에서 내가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했다. 좀 더 오랫동안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빗처럼 내 머리를 빗어 내리던, 곤히 잠든 내 곁에 얼굴을 마주 보고 누워선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던 너를 좀 더 아껴서 눈꺼풀 뒤에 박아두었어야 했는데. 



2.

 우리가 헤어져도, 우리가 겪은 그 수많은 일보다 아프지는 않을 거야.


 너는 가만히 흰 나무의자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그 드넓던 린돈은 와해되어 저물어가고 너의 새로운 왕국은 고요함과 너를 닮은 흰 빛으로 계곡과 계곡사이를 빼곡히 메꾸고 있었지. 또래보다 반 뼘이나 작던 어린 시절의 너는 나긋한 몸가짐의 청년이 되었다가 이제는 임라드리스를 너의 팔 안에 가득 에워싸고 이별을 입에 담았다. 너는 신중하고 지혜로웠지만 언제나 나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내게 네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겪은 그 모든 일만큼, 어쩌면 그 모든 일보다도 아플 것이었는데. 

 너는 알고 있었을까, 몰랐던걸까. 아니면 알고도 외면해야했을까.

 네 표정은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의 것인 양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가느다란 너의 턱선을 눈으로 훑으면 내 시선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의 시선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너는 결심이 선 듯 한 얼굴로 가만히 내 손끝을 만졌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이나 내 손끝을 더듬는 너를 그대로 두었다. 너의 손끝에서는 여전히 약간의 불안감이 느껴졌음으로. 

 나는 네게 그런 결심을 서게 한 것들을 얇은 강바닥 아래로 비쳐 보이는 조약돌처럼 내려다볼 수 있다. 우리는 많이 잃었고, 아마도 너는 더는 잃지 않을 무언가를 견고히 쌓아올리고 싶었겠지. 너의 작은 왕국이 느리게 그러나 확연하게 봄의 녹음처럼 번져나가는 동안 너는 그 사실을 점점 더 깊이 느끼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네 곁에 있을 수 없는 내가 아니라 너를 더 견고한 성채로, 너를 임라드리스의 영주로 만들어줄 부드러운 한 겹의 웃옷을 바라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너는 내가 정말로 네 성혼식에 참석하리라고 여기고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것조차 보내지 못할 사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혹은 네게 재차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네가 성혼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 나는 갈리온이 놀랄만큼 웃었다. 너는 그렇게 너를 임라드리스의 영주로 만들어줄 부드러운 한 꺼풀의 웃옷을, 비단처럼 아름다운 무게중심을 찾았다는 것을 내게 알렸다. 

 내게 그저 알리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마간은 했다.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어 그 먼거리에서 늘상 그런 것들을 공유하던 사이였음으로. 나는 너의 영지에 몇 그루나 되는 꽃나무가 있는지 얼마나 넓은 들판이 있으며 네 성채에 몇 개나 되는 방들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내게 한 겹 우아하게 너를 덮어줄 비단이불 같은 무게중심을 찾았다는 편지를 보냈다. 다를 바는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어느 해에는 네 앞뜰의 어떤 꽃이 피지 않았는지, 네 잠자리가 사납지는 않은지 알고 지냈다. 그 뿐이었다. 나는 본래 그랬듯 내게 남은 그 거대하고 울창한 숲을 뒤로하고 언제든 네게 달려갈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너 또한 그랬다. 너는 너 자체로 견고해져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그늘처럼 부드럽고 온유하던 너를 견고히 다져놓은 것은 그 간의 세월과 점차 자라나는 너의 아이들과 너의 곁에 있던 이였겠지. 나는 그저 너의 글씨에서 너의 목소리로 별의 이름을 딴 세 아이의 이름을 들었다. 



3.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너의 말투는 그간 많이도 변했었는지, 너는 내게 정말로 놀란 듯이 그렇게 물었다. 네가 여기에는 어떻게. 그렇게 묻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너는 어른스러운 말투로, 이제는 여리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청년의 말투와 목소리가 남아있지 않은 현자의 말투로 내게 물었다. 떠난다기에.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너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떠난다기에. 재차 확인하듯 또렷하게 묻는 말에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럴 때도 됐다고 생각했지.

 떠날 때가?

 네가 또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말했을 때 너의 표정을 너는 알고 있을까. 너는 상처받기라도 한 듯이 나를 돌아봤다. 그말이 정말 네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까. 눈썹이 일그러트리면서 너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 짧은 찰나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던 예전의 너를 찾아내고 나는 미소를 띤다. 

 너는 이미 내게서 한 번 떠난 사람이었다. 결심이 굳은 얼굴을 한 주제에 떨리는 손끝으로 내 손마디를 차분히 더듬으며 너는 내게 이별을 이야기했다. 나는 한 번 네가 떠나감을 받아들였다. 상처받기라도 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너를 바라보다 나는 손을 뻗어 네 뺨을 더듬는다. 

 그때의 네가 그랬듯 결심은 섰으나 떨리는 손으로.


 농담이야. 소문으로 들었지.

 자네는.


 네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자네는.

 남을걸세. 

 

 남을거야. 네가 다시 묻기도 전에 나는 서둘러 말을 더한다. 


 어째서.

 늘 자네만 날 애태워서는 내가 억울하니까.

 

 너는 정말로 상처받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이내 조용히 달싹이던 입술을 멈췄다. 그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도 내가 보고싶어하지 않던 입술을 안쓰럽게 매어 문 표정으로. 너는 그 순간에 네가 내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헤아리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말했던 것과 내가 받아들인 것이 같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차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나의 헤어짐은 우리가 겪은 그 수많은 일보다 아팠다는 것을. 내 상처를 헤아리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된 순간 더할나위 없이 상처받았겠지. 괜찮다. 나는 네가 고작 그 정도로 쓰러지거나 날아갈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별을 겪고 다시 상처를 입으며 여기까지 왔으니까. 


 기다려봐 내가 언제쯤 돌아갈는지.


 너는 말없이 떨리던 내 손을 쥐었다가 곧, 그 어디에라도 그 밤에도 핀 꽃이 거기에 있다면 예전처럼 내 머리에 꽃 한 송이를 꽂아줄 것만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잘 가게. 적어도 내가 여기에 남아있는 동안은 네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는 살피고 있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나는 흔한 포옹도 입맞춤도 없이 너를 배웅했다. 깊은 밤에. 네가 떠나는 회색항구에서도, 빛나는 너의 환송식에서도 아닌. 마치 내가 아버지를 따라 린돈에서 떠나던 날의 밤처럼. 너는 한참이나 말없이 내 손을 쥐고 손끝을 더듬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너의 손끝이 그리는 언어는 너의 퀘냐보다도 훨씬 정직하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이나 내 손끝을 더듬는 너를 또 다시 그대로 두었다. 



0.

 우리는 시간 속에서 별처럼 늙어갔다. 한 때는 푸른 별이었다가 붉게 타오르며 나이를 먹어가는 별처럼. 

 요정의 삶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니었음으로 괜찮으리라고 여겼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들이 그 길고 긴 시간을 넘어 너무 자주 찾아오지 않더라도 괜찮으리라고. 우리는 별처럼 긴 시간을 두발로 버티고 살아있으리라고.


 우리는 시간 속에서 별처럼 늙어갔다. 긴 시간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영생을 삶으로 하는 우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 우리는 영생을, 삶을 과신했는지도 모른다. 에다인의 삶과는 다르게 우리의 시간은 언제든 처음처럼 돌아오는 것이리라고. 



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바다에 나가본 적은 어린 시절 이후로 내게 없었다. 청년이었던 너와 손을 붙잡고 아무도 없는 그 들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던 때를 제외하면. 배를 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아버지의 왕국은, 그리고 나의 왕국은 깊은 숲 안에 존재했다. 

 배를 탄다는 것이 고된 일이 아님을 빈다. 서녘으로 가는 너의 마지막 여행조차 고되지는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음으로. 



0.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1.

 네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구로부터 어떻게 도달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네가 탄 배가 여기에 닿기까지, 나는 그것이 얼마나 걸릴까 손을 꼽아 생각한다. 이곳의 하루들은 충분하고 풍족하여 낮과 밤의 경계도 날과 날의 경계도 온통 흐리다. 온유한 양수에 감싸인 양 나는 현자도 치유자도 아닌 별의 계보 끝자락의 어떤 요정으로 돌아와 너를 기다린다. 

 너의 배가 순풍에 휩싸여 그 먼 길을 하루처럼 돌아오기를. 너는 고단하겠지. 나는 오래도록 네가 그 고단한 세월을 혼자 견디도록 너를 두었다. 네가 돌아오면 잠든 네 머리칼을 손끝으로 천천히 빗어내던 그 여름날처럼 너를 쉬이게 할 수 있을까.

 너의 배는 지금쯤 순항하고 있을까. 



-

스란엘 합작에 제출했던 글. 제목은 달리 정할게 없어서.  요즘 자주듣는 Manhattan을 BGM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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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관제탑

from archive/Tolkien 2014. 3. 23. 22:22



0. 

  너는 지상의 중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있을까. 


0. 

  나는 단 한 번도 네 비행기에 타 본적이 없다.


1. 

  밤의 공항은 적막하다. 그 적막함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피로와 긴장감 이따금 무거운 설렘을 읽는다. 너는 얼마나 많은 공항의 벽들이 창의 형태를 하고 밖을 향해 나있는지 알고 있을까. 밤이 되어 불빛이 하나 둘 켜져도 공항은 흰 백색등의 빛 아래에서 조용하고 음울하게 빛난다. 밤의 어둠과 주홍색으로 부옇게 빛나는 빛들이 안으로 스며들어 창가의 벤치에 몸을 기대고 잠을 청하는 이들의 발치를 얕은 파도처럼 감싸면 많은 기계들이 멀리서 내는 웅웅거리는 진동이 그 위를 얄팍한 담요처럼 덮는다. 마치 조용한 새벽의 집에서 울리는 냉장고의 소리처럼 멀리서 진동으로만 전해져오는 소리들 사이에서 창하나 뚫려있지 않은 화물기가 날아와 새벽을 맞는다. 

  사람들에게는 제각각의 행선지가 제각각의 삶이 있다. 켜지는 활주로의 유도등만큼의 삶. 매일 뜨고 내리는 수백편의 비행기와 비행기의 행선지만큼의 삶과 고향들이 공항의 온갖곳들에서 형태가 되지 못한 채로, 기다림으로 살아 숨을 쉰다. 너는 그것들이 피곤하게 토해내는 숨들을, 오르내리는 가슴과 등을 알고 있을까. 너는 그것들을 싣고 나는 것이다. 너는. 나의 너는. 


2. 

  나는 단 한 번도 네 비행기에 타 본적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삶과, 행선지와, 감정들이 너의 비행기에 실려 목적지를 향해 떠나고 돌아오는 동안에도 나는 단 한번도 너와 함께 어디로든 날아본 적이 없다. 너의 비행기는 아늑하겠지. 네가 실어나르던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의 요람처럼, 거쳐가는 고래의 뱃속처럼 따듯하고 부드럽게 저 길고 둥근 지구의 항로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돌아오는 공항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네가 떠나는 그곳이 아니라 네가 돌아올 곳에서 나는 새벽의 관제탑을 밝히고 너의 발치 아래에서 너의 가느다란 새의 발같은 비행기의 보조바퀴 아래에서 빛나는 활주로를 연다. 


3.

  피곤을 끌며 돌아오는 너를 반기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너의 그 육중한 기체. 하늘을 나는 고래처럼 우아하고 무거우며 아름다운 것이 미끄러져 들어오기를 대비하면서 나는 너를 위해서 불을 밝히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관제탑의 새벽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목은 잠기고, 나는 끊임없이 따듯한 싸구려 커피를 잔에 채워 넣으면서 너를 기다린다. 무사히 너의 비행기가 땅에 내려앉는 순간 느끼는 환희를 내가 어떤 말로 설명해야할까. 통신기를 타고 전해지는 너의 얕은 한숨소리. 너의 안도감. 나는 오래도록 그 목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샜다. 네가 어두운 시야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누구보다도 오랜 야간비행을 하는 너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그 밤이 주는 고독과 싸워 이겨내고 있는 너를 위하여. 

  너의 그 무거운 짐들이, 책임감들이 덜컹거리지 않고 다치지 않게 무사히 그 긴 활주로를 내려와 내게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0. 

  너는 지상의 중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있을까. 중력처럼 온전하게 너를 끌어당겨 돌아오게 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너를 지상으로. 너를 너른 시멘트의 평야위로, 너를 공항으로, 너를 내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0. 

  사랑하는 엘론드. 네가 내게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0. 

  너는 지상의 중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있을까.




-

관제탑의 관제사 스란두일과 파일럿 엘론드를 바탕으로한 조각. AU. 

밤공항과 관제탑과 비행기와 빛나는 활주로는 모두 로맨틱 합니다. BGM은 Sara Bareilles의 Gravity.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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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이제는

from archive/Tolkien 2014. 3. 17. 23:54




 산책을 가야지. 그는 돌연히 긴 회랑을 넘어와 장서관의 계단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선다. 정무를 마친 푸른 옷을 입은 채다. 엘론드는 계단 위에 앉아있다 마중을 나온 길갈라드를 보며 손을 뻗었다. 산책을 가야지. 길갈라드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회랑의 긴 아치를 따라 메아리처럼 넘실거리고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린돈의 언어는 오래된 요정의 주문과 같다. 엘론드는 그의 손을 잡고 느리게 언덕을 따라 내려간다. 린돈에 피는 황금 같은 꽃들이 작은 발에 채이는 동안 서녘으로 느리게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바다가 보일 때까지 느리게 언덕을 내려가 짙푸른 옷에 풀물이 들도록 앉아 엘론드를 안는다. 엘론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숨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숨이 차오기 시작하면 다시 입술을 열어 큰 숨을 내어 쉬고 다시 숨을 멈춘다. 그의 숨소리는 공기의 소리처럼, 여름의 고요한 더운 바람처럼 들고 난다. 그는 긴 소매가 풀물에, 풀꽃에 스쳐 물이 들도록 너른 품을 한껏 내어주고 이야기한다. 요정의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서 엘론드는 어렴풋한 별들의 이야기를, 에아렌딜의 이야기와, 서녘으로 향하는 바다의 이야기와 조선공의 이야기를 듣는다. 엘론드는 길게 숨을 멈춘다. 이번에는, 숨이 차오르지 않는다. 그는 섬세하지 못한 손끝으로 풀꽃을 뜯어 줄기를 엮기 시작한다. 창을 쥐는 손이 여린 손에 닿으면 거친 굳은살에 여린 살이 발갛게 쓸리기도 수차례였다. 엘론드는 그가 끼워주는 어설픈 풀꽃 반지를 손에 끼우고 그의 가슴 위로 머리를 기댄다. 숨도 쉬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품은 넓고 평온하다. 가위라도 눌린 듯 갑갑하게 메인 성대로 엘론드는 가까스로 가느다란 자장가를 부른다. 놀도르의 자장가구나. 엘론드는 새처럼 놀라 그를 돌아본다. 지는 햇살에 빛나는 얼굴은 평온하고 희미하다. 엘론드는 숨을 헐떡인다. 길갈라드의 손이 가만히 가슴을 누른다. 길고 어두운 밤길을 헤메이던 이들의 자장가를 들어도 길갈라드의 얼굴은 여전히 지는 햇살에 비쳐 흐리다. 엘론드는 오랫동안 그가 잇는 말을 기다린다. 눈을 깜박이면 시간이 반토막이 난 듯 길갈라드는 웃는다. 그 분은 뱃노래 밖에 모르던 분이란다 페레델. 누가요? 소리가 되지 않는 말로 물으면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누가요? 그의 얼굴은 여전히 햇살에 비쳐 희미한 형체처럼 보인다. 페레델. 부르는 소리에 다시 돌아보면 길갈라드는 이제 흰 모퉁이를 돌아 아치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다. 쪽빛 의복을 걸치고 흰 자수로 별을 박은 금빛 요대. 장신의 왕. 엘론드는 침상의 머리에 기댄 몸을 일으켜 손에 든 책을 내려놓는다. 일어나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따듯하고 단호하다. 왕의 목소리는 서슬퍼렇게 날이 서지 않고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끔 했다. 그는 아치 아래에서 침상까지 성큼 한걸음에 걸어와 침상 끝에 앉는다. 너른너른 퍼진 의복이 홑겹의 이불을 덮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는 손을 뻗어 길게 자란 발목을 붙잡는다. 봄꽃이 예쁘게 피었더구나. 그의 옷에서는 가을처럼 서늘한 바람의 내음이 난다. 산책을 가야지, 아가. 느리게 목이 메여온다. 

 언제쯤 일어날 셈이냐. 서늘한 손이 머리를 짚는다. 엘론드는 눈을 감는다. 그의 음성에 머리가 혼곤하다. 마치 의식이라도 잃었던 양 혼미하다. 엘론드는 그의 등 뒤로 팔을 견고하게 가다듬는다. 느리게 차오르는 울음소리를 겨우 삼켜내면 그의 목소리에는 따듯한 웃음소리가 섞인다. 언제쯤 나을 셈이냐 페레델. 그는 연기처럼 빠져나가 견고하게 고쳐 안은 두 팔은 둥근 흔적처럼 남는다. 

 이제 그만 아플 때도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긴 회랑을 따라 들리던 메아리처럼 흘러든다. 그는 이제 저 회랑의 끝에, 저 회랑의 문 너머에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그만 아플 때도 되었다, 페레델. 가까스로 차오르는 울음을 삼켰는데도 감은 눈커풀이 뜨거워진다. 눈을 뜨면, 이제 눈을 뜨면 그의 목소리도 사라질 것을 어렴풋이 안다. 페레델. 조금만 더. 페레델. 제발. 


 

 “엘론드.”

 엘론드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밤에 어울리지 않는다. 뜨지 못한 눈으로도 그가 린돈에 남은 마지막 황금색 들처럼 웃는 것이 선하다.

 “핀웨 가의 자장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당신뿐일 겁니다.”

 “가세요.”

 지금은. 덧붙이지 않아도 글로르핀델은 가야할 때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눈꺼풀에 남은 잔상이라도 더듬으려는 애처로운 후희를 그는 웃음기 어린 한마디로 깨트려놓는다. 햇살처럼 따스하게, 요정의 목울대를 울려 퍼지는 소리는 먼 회랑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한 겹 꿈 안으로 밀어 넣는다. 페레델. 산책을 가야지 아가. 저 먼 회랑 끝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가물가물 사그라든다. 

 “좀 더 눈을 붙이는 게 좋겠네요.”

 엘론드는 그의 말에 몸을 일으켜 침상의 머리에 기대어 앉는다. 글로르핀델은 가만히 웃음만 지었다. 그 웃음에 섞인 연민을 헤아리는데도 이제는 지쳐 손이 얼굴을 덮는다. 


 

 산책을 가야지, 아가. 산책을…. 이제는 당신을 보면 아, 꿈이로구나. 산책을 가야지. 희미하게 빛나는 마치 흐려진 그림 같은 얼굴을 하고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꺼내는지 당신의 모습은 여전히 쉽게 그려진다. 오후의 정무를 마치고 장서관 앞까지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달려오던 옷이 어떤 쪽빛이었는지, 옷깃을 여민 요대에 박힌 흰 별은 몇이나 되었는지도 여전히 셀 수 있었다. 장신의 몸을 뒤덮은 새벽 동틀녘 같던 옷들. 걸음을 옮기던 발이 어떻게 긴 옷자락 끝을 들어올렸는지, 그 묵직하고 소리 없는 발걸음이 어떻게 새벽 공기를 울리며 침상으로 스며들었는지 조차도 생생하다. 점막 안을 아프게 갈퀴고 지나가는 그 봄날 린돈에 피던 황금같은 꽃향기. 세월에 바라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키면 어렴풋한 감정만 남는 것이 꿈인 줄로만 알았는데. 꿈에서도 꿈이로구나. 목이 메이고 나면 그 뒤에는 꿈에서조차 이제는 그만 아플 때가 되질 않았느냐 다독여, 겨우 추슬러 감춘 것들을 열고 등을 떠미는 손길이 야속해서 메인 목이 아프다. 

 언덕빼기 아래로 여름마다 강이 범람하면 이듬해에는 풍족한 옥토로 다시금 변하던 린돈의 땅들. 평야들. 언덕과 실개울들. 당신의 남색 옷자락 끝에서 누웠다 일어나던 그 여리고 따사롭던 풀잎들. 그 시절에는 놀랍지 않았던 당신이 일궈낸 풍요로움의 흔적들. 그 가운데에서 금방이라도 당신이 임라드리스의 기둥 사이를 넘어 들이닥칠 것만 같은 꿈을 눈을 뜨고는 꾼다. 전쟁의 상처를 짊어진 채로 젊은 청년에서 왕으로 자란 당신 걸음에 소리가 있을 리 없어 문득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는 바람소리에도 임라드리스의 흰 기둥 사이를 돌아본다. 발걸음에 소리라도 있었다면 문득, 문득 누구도 없는 회랑을 돌아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흰 기둥사이로 푸른 옷자락을 찾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어서. 

 꿈도 꾸지 않는 긴 잠에 들면 그리움도 사라지지 않을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녘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으면 오래 전에 떠난 당신이 아름다운 항구에 나와 맞아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헤아린다. 해변을 따라 요정들이 뿌려놓은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있다는 모래사장을 맨발로 내딛으면 몸이 젖어들다 바다의 물처럼 변할 때까지 그 모래에 박혀 당신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바다의 물처럼 변할 때까지.  

 꿈에서 당신을 볼 때마다 이제는 꿈이구나 참아온 눈물들을 쏟아내면 지금도 나는 바다처럼.

 

 산책을 가야지, 아가. 이제는 당신을 보면 아, 꿈이로구나. 어른어른 물에 잠겨.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황인숙, 꿈.



-

길엘 합작에 공개되었던 글입니다 :) 

본래 생각했던 bgm은 라나 델 레이의 Young and Beautiful 이었는데, 글 보고 떠오른다고 해주신 노래가 더 어울려서 넣었어요: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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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LITM

2014. 2. 2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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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단문

from archive/Tolkien 2014. 2. 25. 03:03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희다. 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나이인데도 너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였다. 고사리처럼 작던 손에서는 손가락들이 얇고 아름다운 봄날의 가지처럼 자랐고, 희고 긴 팔다리는 조금씩 안부터 단단해졌다. 입에 포도알을 물려주면 겨우 한 입에 머금던 입술도, 곧지만 야트막한 산등성이 같던 콧대도 자랐다. 색이 짙어지고 입술이 벌어지면 아이 특유의 크고 귀엽던 이빨들도 가지런한 모양으로 변해있었다. 우묵하게 자란 뼈대 안의 눈동자 위로는 짙고 아름다운 그늘이 졌다. 그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니. 손을 뻗어 책을 건네받을 때 마다 매끄러운 팔 아래로 느리게 걷혀 내려가는 소맷자락. 콩콩 발을 구르고 너른 들 위를 뛰어다니던 두 다리는 이제 제법 청년의 것처럼 움직인다. 뛰지도 발을 구르지도 않는 발걸음 아래에서 움직임에 파도처럼 일렁여오는 대기가 얼굴을 부드럽게 감쌀 때마다 갈비뼈 안쪽에서 느리게 물밀 듯 밀려오는 따듯한 봄바람을! 엘론드. 그렇게 부르면 돌아보는 너는, 오른 어깨를 뒤로 밀어내며 얼굴을 돌린다. 너의 가느다란 목이 돌아보는 얼굴을 따라 움직이고, 속눈썹을 매끄럽게 들어올리고나면 짙게 변한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소리 없이 초조한 것 없이 움직인다. 그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너와 너의 그림자와 너의 미래 사이에서 느린 바람에 이는 갈대처럼 휘청인다. 너의 얼굴에서 여전히 어린 너를 보고, 청년처럼 빛나듯 아름다운 너와, 무르익어 성년이 된 너를 본다. 너의 얼굴은 오래 전에 알고 있던 그 친우의 것처럼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피를 빌어 지금보다 아름답게, 요정이 가장 사랑하는 과실처럼 농익어 갈테다. 새로 난 여린 가지처럼 길게 자란 손가락은 뼈마디가 자라고, 그 손끝에 검과 책으로 상처입은 굳은살이 둥지를 틀 듯 자리를 잡겠지. 너의 다리는 내가 곧 등 뒤에 서서 팔을 벌려주지 않아도 될만큼 곧게 땅을 딛고 서는 법을 알게 될 터였다. 요정의 예지력이 아니라 너의 얼굴이, 너의 젊은 얼굴에 켜켜이 쌓인 너의 핏줄과 너의 어린 시절이 보여주는 그림자이다. 빛이 변하면 사물의 색이 변하듯이. 네가 살아가는 시간과 함께 내가 알고 있던 작은 몸도 탈 없이 변해간다. 나의 성채에서. 빛이 드는 상아색의 회랑을 따라 걸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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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란엘 뱀파이어AU







 물기를 머금은 거리는 가스등불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퀴퀴한 가죽냄새가 올라올 정도로 잔뜩 젖어 내피까지 물컹해진 구두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물에 비친 등불이 주홍색으로 흔들렸다. 거리는 이른 잠에 빠져있었다. 옆으로 좁고 위로 층을 더한 벽돌건물들은 모두 커튼을 닫고 추운 겨울의 밤을 일지감치 잠의 뒷켠으로 보낸다. 어깨를 나란히 한 건물 굴뚝 위로 물기에 젖은 연기만 짧은 입김처럼 새어나왔다. 남자는 검은 우산을 접고 코트의 어깨에 맺힌 빗방울을 턴다. 무릎을 한차례 크게 들어 올려야 내딛을 수 있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문을 두드리자 문 위의 작은 아치형 창문 너머로 불이 들었다. 필라멘트가 거의 다 타들어가 음울한 주홍색으로 빛나는 낡은 전깃불이 깜박인다. 곧 전구를 갈아주어야 할 테지만 그 전에 이 집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는 머리끝까지 온통 붉은 담요로 몸을 뒤덮은 채 나와 문을 열었다. 곳곳이 구겨진 셔츠 위로 아무렇게나 헝클어지고 쳐진 금발과 차가운 나무 바닥을 딛고 있는 창백하고 큰 발. 그는 좀 전에 그가 내려왔을 계단의 난간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남자를 바라본다. 몸을 기대고 있던 검은 우산살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둥글게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자 그의 오른발이 뒤로 물러났다.

 “늦었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건조하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담요를 추켜올리던 손으로 목덜미를 누르고 얕은 헛기침을 뱉는다.

 “먹을 만한 걸 좀 가져오느라.”

 “그 놈의 쥐새끼는 집 안에도 충분해, 엘론드.”

 그의 걸음은 폭이 크다. 스란두일은 신경질 적으로 엘론드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아 벽에 검은 우산을 기대어 놓는다. 엘론드는 그의 행동에도 희미하게 웃으며 신문지로 여러 번 감싸 동여맨 꾸러미를 내밀었다. 빗물에 얼룩져 푹 젖은 꾸러미를 받아들자 스란두일의 손 안에서 꾸러미가 팔딱 뛴다.

 “사람이 이렇게 작을 리는 없을테고.”

 꾸러미가 힘없이 또 팔딱 뛰었다.

 “토끼야. 구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어.”

 엘론드는 비에 젖은 코트를 벗는다. 주홍색의 타 들어간 필라멘트 아래서 그의 입술은 희게 질린 것처럼 보인다.

 “모처럼의 비오는 날인데 시체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제발 그냥 받아. 앞으로 보름은 또 쥐새끼로 연명해야 할 테니까.”

 엘론드의 손이 스란두일의 어깨 위에 잠시 머무른다. 그의 젖은 손이 스란두일이 아무렇게나 뒤집어쓴 담요 모퉁이를 깊은 색으로 적셨다.

비가 오는 날 만큼 먹이를 구하기에 적당한 날도 없었다. 싸구려 비옷으로 감싼 경찰들은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일찌감치 골목사이로 사라지고 밤마다 들끓던 사창가도 장사를 접는 날이었다. 피의 냄새, 사체의 갓 부패하기 시작하는 싱싱한 살의 냄새도 빗물에 씻겨나가는 날이었다. 운이 좋으면 불어난 강물 위로 신선한 사체 하나쯤이 떠오르기도 하는 몫 좋은 날인데 그는 지금 모처럼의 포식을 놓쳐버렸다고 순순히 터놓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꾸러미의 머리가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곳에 손을 얹는다. 손바닥 아래에서 가늘게 오르내리던 숨이 잠시 끊어진다. 다시 움직인다.

 “멍청하긴. 사람 목 좀 뜯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고상한 척을 하느냔 말야.”

 스란두일은 그의 발아래에서 푹 젖어버린 현관 깔개를 흰 발로 걷어찬다.

 “피곤하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한다. 스란두일이 금방이라도 쏟아낼 불평들을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투였다.

 “이만한 토끼 한 마리로 두 사람 배가 찰 것 같은가?”

 스란두일은 꾸러미 아래에서 종이가 젖은 소리로 퍼덕이는 소리를 듣는다. 머리 아래로 손가락 두마디를 더듬자 짐승의 모가지가 손아귀에 꽉 찼다.

 “자네 혼자 마셔. 난 됐으니까.”

 

 “굶어 죽기라도 하려고?”

 스란두일의 말에 엘론드는 웃는다.

 “제발 그러기라도 했으면 좋겠군.”

 푹 젖은 웃음이었다.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엘론드는 스란두일에게서 등을 돌려 현관을 꽉 채운 계단을 밟아 오른다. 그의 뒷모습은 물에 젖은 토끼 따위나 주우러 다녔던 사람답지 않게 단정하다. 그의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 밑에서 얇게 접힌 깃과 그 밑으로 가느다란 선으로 내려오는 박음새들. 엘론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팔에 걸린 코트를 고쳐 맨 다음 자신이 올라온 계단에 남은 구두모양의 물자욱을 바라보고 구두를 벗었다. 그는 검지와 중지로 구두를 가지런히 모아 손에 든다. 이제는 물에 젖은 그의 발을 감싼 얇은 천에서 물이 배어나온다. 스란두일은 머리 끝까지 뒤덮고 있던 담요를 뒤로 젖힌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계단 위로 사라진다.

 

 

 

 좁은 복도를 가득 메운 계단을 오르면 그 위에는 작은 거실이 있었다. 낡은 벽은 벽지를 바른지 적어도 이십여년은 지난 것처럼 붉은 것들이 죄 시간에 바래 갈색으로 변한, 드문드문 검은 페이즐리 문양만이 얼룩처럼 남은 거실. 스란두일은 열린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느리고 끌리는 발걸음으로 카페트 위를 걸어다니는 엘론드를 바라본다. 그는 비에 젖은 코트를 걸어두고 양말을 벗어 젖은 장작이 타는 난롯가에 널어둔 뒤에 낡고 붉은 소파에 완전히 몸을 파묻는다. 그가 소파에 앉아 아래로 푹 꺼져가는 동안 검은 광목천 같은 머리칼이 등받이를 문질렀다.

 “엘론드.”

 손바닥 위의 꾸러미는 스란두일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계단 위에 점점이 물자욱을 냈다. 물자욱을 내던 것이 거실의 문가에 와서는 발등 위로 묽어진 피 같은 것을 떨어트린다. 손 안에서 헐떡이던 숨이 멈춘 것도 같다. 스란두일은 엘론드를 불렀다. 그의 이름을 구성하는 알파벳을 전부 하나의 음절로 만들어 부르듯이 정확한 발음으로. 아마도 스란두일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그는 오십년 전에도, 그리고 아마 백년이나 이백년 전에도 또는 십수세기 전에도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느리게 형태를 바꾸어 입는 언어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과 함께 /예전의 언어를 입은 채다. 언어는 세월에 닳지 않았는데 혀끝을 맴도는 공기가 뭉툭해졌다.

 “조금이라도 마시는 게 어때.”

 스란두일은 토끼의 몸을 감싼 신문지를 한 겹씩 벗겼다. 짐승에 몸에 철퍽하게 달라붙은 종이는 하나의 작은 지면기사가 끝나기도 전에 손가락 끝에서 섬유처럼 뭉그러졌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타는 장작과 난롯가 그 어디쯤에 있다. 손이 이번에는 뭉그러지는 종잇장을 단번에 뜯어낸다. 젖은 짐승의 털이 얇은 살점과 함께 손톱 아래에 박혔다. 뜯겨나간 종잇장 아래로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내는 짐승은 갈색 들토끼였다.

스란두일은 기댄 어깨를 추슬러 선다. 핏물이 떨어진 발등은 희고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마른 발등 위로 단단하고 굵은 뼈가 도드라진다.

 “마셔.”

 내민 손은 갈색의 짐승털로 지저분하다. 짐승의 몸통은 드문드문 살점이 패였다.

 “나는 됐어. 자네나 마시게.”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니잖아.”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닌데 뭐 어떤가.”

 그의 검은 머리칼이 골이 패인 소파의 등받이 위에서 이리저리 뭉개진다. 엘론드는 여전히 질린 입술을 하고 눈꺼풀과 눈동자만 들어 스란두일을 올려본다. 엘론드는 그의 오래된 연인의, 아니 어쩌면 연인은 아닐 남자의 입술에 스산한 웃음이 걸리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다. 얕은 웃음이 짐승의 살점처럼 가느다란 입술의 주름 곳곳에 저며있다.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자네가 원했잖아.”

 

 “날 사랑하니 제발 같이 있게 해달라고 한 건 자네였어.”

 스란두일은 오른 무릎을 바닥에 대고 꿇어앉는다. 그의 무릎위에 살점이 떨어져나간 작은 짐승을 얹고 짐승의 털과 피와 살로 얼룩이 진 손가락으로 긴 금발을 쓸어 넘긴다.

 “더 말렸어야지. 사랑스러운 엘론드. 죽은 쥐새끼 시체에 이빨이나 파묻고 사는 삶이어도 괜찮느냐고 물었어야지. 장작이 타는 난롯가에 기대어 앉아도 온기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삶이어도 괜찮느냐고 물었어야지.”

 이렇게 추운 겨울인데 말이야. 엘론드. 가느다랗고 부석한 금발에 붉은 물이 든다. 그는 스란두일의 눈길을 피하는데 벅차 시선을 돌리다가 스란두일의 머리칼에 남은 붉은 자욱들을 보고 입을 틀어막는다.

 “자네는,”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목소리가 새 나왔다.

 “자네는 그렇게 하게.”

 물에 젖은 장작이 타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헐떡이던 짐승의 숨소리도 멈춘지 오래였다. 그들의 입술에서는 오래전부터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자네는 그렇게 해.”

 스란두일은 입을 틀어막은 엘론드의 손을 바라본다. 식물의 수관처럼 마른 손가락 마디마디 불거져 나온 뼈대와 낮은 온도에 벌겋게 번진 손등. 스란두일의 시선을 느낀 손이 남은 손등을 덮어 문지른다.

 “내가? 누굴?”

 옅은 회색 눈이 아주 짧게 스란두일의 눈동자에 머무른다.

 “누구한테!”

 스란두일은 그의 무릎 위에 올려진 짐승 채로 그의 다리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스산하고 아름다운 얼굴 아래에서 드러난 송곳니가 번쩍였다. 그는 스란두일의 표정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는 듯이 한껏 숨을 끌어올려 가슴을 부풀리면서 몸을 뒤로 젖힌다. 엘론드는 눈을 감고 목을 어깨에 파묻은 채로 고개를 완전히 튼다.

 ‘알잖아.’

 그는 입술은 눅눅하게 젖어 열리지 않았고 그의 목은 뒤틀려 목울대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스란두일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따금 환청처럼 엘론드는 소리도 목소리도 아닌 것으로 대답한다.

 스란두일의 몸 아래에서 들짐승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둥근 봉오리처럼 짐승의 내장을 감싼 갈비뼈들이 차례로 부러지는 소리였을 것이다. 부러진 뼈가 그것의 내장을 가르고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열린 구멍에서 핏물이 흘러나온다. 그의 바지위로 짐승의 피가 축축하게 젖어든다. 스란두일이 짐승의 몸 위에 싣은 무게를 덜어내자 그는 겨우 숨을 몰아 내쉬었다. 뒤로 젖혀져 한껏 부풀었던 그의 가슴이 가라앉는다.

 

 “자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건 내가 자넬 사랑해서였지. 자네가 날 사랑해서가 아니었지.”

 

 엘론드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몸에서 들짐승의 피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린다. 비좁은 틈새 사이를 갉아먹고 사는 쥐들이 짐승의 피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스란두일은 두 무릎을 모두 땅에 붙이고 엘론드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그가 놀라 파득 몸을 떤다. 푹 젖은 들짐승의 목덜미에 드러낸 이를 박으면 드러낸 송곳니가 가죽을 찢고 들어가는 파열음이 났다. 엘론드는 스란두일의 어깨위로 흘러내린 머리칼들을 손등으로 걷어내어 귀에 걸었다. 스란두일은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그는 스란두일의 버석한 머리칼 끝을 손가락에 끼워 느리게 문지르다가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입술을 벌렸다. 짐승의 체온은 비에 씻겨내려가 완전히 차가워 진 줄로만 알았는데 피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도로 뛸 것처럼 따듯했다. 스란두일은 열린 입술 사이로 천천히 자신의 입안에 고여있던 피를 흘려넣었다. 머리칼을 쥐는 엘론드의 손을 잡았던 손이 그의 팔을 타고 올라가, 희고 마른 목을 더듬어 그의 뺨으로 옮겨간다. 열린 입술이 닫히지 못하도록 엄지 끝으로 입술 아래의 도톰한 살을 힘주어 눌러 내리면 길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뺨을 감싼다. 스란두일은 흘려 넣은 것들이 그의 선분홍색 목젖 뒤로 넘어가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힘줄이 도드라진 손을 떼어냈다.

 “그래도 쥐보다는 낫군. 그렇지 엘론드?”

 “자네 몫은?”

 “그런다고 죽을 목숨도 아니잖아.”

 입술에 고여있던 피가 막 흐르려는 찰나에 스란두일은 손등으로 제 입술을 훔쳤다. 도처에 쥐새끼가 널려있어도 싱싱한 네발짐승의 피만 못했다. 양도 적은데다가 거죽에서는 시궁창 냄새가 나는 쥐새끼의 털에 코를 박고 싶을 리가 없었다. 막 입에 피칠을 하니 목구멍 뒤에서 찌르는 듯한 갈증이 올라온다. 엘론드는 허리를 세우며 일어나던 스란두일의 팔목을 붙잡는다.

 “왜.”

 엘론드는 가늘게 떨리는 팔목을 더듬어 손바닥이 움푹 패이도록 갈등을 거머쥔 주먹을 손에 넣는다. 접힌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나가는 동안 힘겹게 돌아서려던 스란두일의 시선이 정수리에 꽂혀있는 것이 생생하다. 펼쳐진 스란두일의 손바닥에는 짐승의 털과 핏자국만 남았다. 그는 힘이 빠진 스란두일의 손바닥을 들어올려 자신의 왼 목덜미에 얹는다. 스란두일이 얼마간의 정적을 지키다 얕은 목소리로 웃었다. 마른 목덜미에는 여러 번이나 같은 자리에 흉터가 졌던 듯이 피부의 색이 붉게 변한 자국이 나란하다. 스란두일이 허리를 숙인다. 모처럼 그가 넘겨준 머리칼들이 쏟아졌다. 자네, 나한테 숨기는게 있지? 스란두일이 속삭인다. 그리고 허연 살결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뒤통수에 무게추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목이 꺾였다.

 

 

 

 

 “해가 일찍 져서 다행이었어.”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작은 들짐승을 하나 잡았던 날 후로 엘론드는 제대로 밖을 나다닐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드물게 오래도록 비도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임에도 몸이 나아졌다는 핑계로 엘론드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근래에 일찌감치 해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어둑한 하늘 탓에 제대로 빛이 들지 않아 몇몇일은 낮에도 커튼을 열어놓기도 했다. 엘론드는 외투를 벗고 희미하게 비쳐드는 빛을 가려주던 모자를 벗는다. 그가 소매 끝의 커프스단추를 완전히 풀어내 난롯가 위에 올려둘 때까지도 스란두일은 말이 없었다.

 “빈 손이라서 화가 났나, 자네?”

 “내가 그따위 것으로 화내는 치졸한 놈이었나.”

 “음.”

 엘론드는 얄팍하게 웃었다. 글쎄.

 “그렇게 보인다는 거군.”

 

 “어떤 남자가 전해달라고 하던데.”

 스란두일은 뜸을 들이다 팔짱을 풀며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엘론드에게 내밀었다. 엘론드가 손을 뻗는 순간 스란두일은 편지의 모퉁이로 제 뺨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 거처를 아는 사람이 있나?”

 “아니”

 “알려주지도 않은 집 문을 두드려서 직접 편지를 전해줬는데도?”

 “모르는 일이야.”

 날카로운 모서리가 엘론드의 턱끝을 훑었다.

 “자네가 훔쳐보는 그 남자더군. 응? 검은 머리에 눈이 잿..”

 스란두일은 소리내어 하하 웃는다. 엘론드의 뺨이 얼어붙어있었다. 이름이 무어라고 했더라. 무어라고 전해달라고 했더라. 편지의 겉면은 깨끗한 흰색이다. 받는 이의 이름도, 쓰는 사람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다. 아마도 엘론드는 스란두일이 그의 눈길을 거기까지 쫓았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스란두일은 얼어붙은 엘론드를 바라보다 그의 얼굴 옆으로 손을 뻗어 창문을 가린 커튼을 들춰본다. 남자는 거리의 모퉁이 건물의 그림자 안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엘론드가 거리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편지를 전해주고는 사라진 듯 했던 남자는 엘론드의 모습이 창문에서 보일 때쯤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얼어붙은 걸 보니 아는 사람이야.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자네는 아나?”

 엘론드는 그의 턱끝을 날카롭게 훑는 편지를 잡아챈다. 깨끗한 겉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편지를 뒤집었을 때 그는 봉되어있던 밀랍이 한차례 뜯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 숨길 일도 아니잖아.”

 안 그런가? 자네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알아야지. 엘론드는 느린 손으로 봉이 뜯겨나간 편지지를 펼쳤다. 스란두일이 떨리는 엘론드의 손목을 받친다.

 “그래서 그 자가 말하는 대로 같이 떠나려고? 으슥한 창문 뒤에 숨어서 바라만 보던 자네가?”

스란두일은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들어 편지를 읽는 엘론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어붙은 뺨이 잘게 떨린다. 그는 펼쳐진 편지를 다시 접는다. 원래 접혀있던 모양대로 천천히 접어 닫히지 않는 도톰한 밀랍을 엄지로 더듬었다.

 “그 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길-”

 “길 갈라드.”

 “잘 아는군. 단박에 나올 정도야. 입 속에서 수천 번은 굴려봤나?”

 “스란두일!”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쥐고있던 편지가 손끝에서 스윽 빠져나간다. 엘론드가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돌아보았을 때 스란두일은 이미 타는 난롯가에 편지를 던져넣고 있었다. 탁, 탁. 하고 종이 끝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멈춘다.

 “자네는 못 가.”

 

 “날 이렇게 만든 건 자네야,”

 엘론드는 한참동안 허망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스란두일의 팔은 희고 차가운 뱀처럼 엘론드의 목과 등을 감싼다. 스란두일의 팔은 뱀처럼 차갑고 뱀의 비늘처럼 단단하다. 빈틈없이 끌어안기면 물에 잠긴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개같군. 알아?”

 스란두일은 엘론드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손톱 아래의 피부는 푸르스름하게 질린 색이었다. 한겨울인데도 말을 내뱉는 입술 끝에서는 입김이 흐르지 않는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자네는 외롭고 무지했지. 긴 시간을 혼자 보내기에는 무서워서 날 선택했어. 그자들의 밀회도, 그자들이 어떻게 사냥하는지도 몰랐지. 자네한테는 나 밖에 없었어. 자네만큼 무지하고 자네에게 의지하는 나 밖에는.”

 “그런데, 저. 창 밖에.”

 비늘처럼 단단한 팔 안에서 그는 창을 향해 돌아선다. 완전히 어두워진 창 밖으로 흐린 가스등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스란두일은 엘론드의 어깨를 쥐었다. 엘론드의 마른 등에 가슴팍이 닿는다. 스란두일의 입술이 목덜미 뒤에 숨을 끼치고 다가와 귓가에 말했다.

 “자네가 오랫동안 바란 그 사람이 자네와, 나와 같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늘 궁금했지. 자네가 비오는 거리를, 해 진 거리를 걸으면서 뭘 보고 다니는지. 자네와 다르게 나는 여전히 약한 볕 아래에도 나갈 수가 없는 몸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자네의 시선을 쫓기 시작한 거야.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지. 자네는 쉽게 어디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유달리 자네가 오래 지켜보는 때가 있어. 이따금 동쪽의 체링크로스가를 따라서 광장으로 나서는 남자. 이름이, 그래 길 갈라드라고 했나. 자네가 그 사람을 꽤 오래 바라보더군.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편지를 읽자하니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자가 먼저 접근했을 수도 있겠지. 동족의 냄새 같은 걸 맡고 말이야. 자네가 그 자를 어떻게 알았는 지는 모르지만.

근래에 그 자와 만난 적이 있지? 근래가 아닌가? 조금 더 되었나?

 

 목줄기 뒤부터 소름이 얼음처럼 돋아나는 것 같았다.

 

 요즘 날이 흐렸지. 구름이 많이 낀 날씨더군. 그랬지, 엘론드? 그래서 커튼을 좀 열어놓았지.

 

 “최근에는 자네와 함께 산책을 좀 했는데. 몰랐나?”

 

 자네가 걷는 길을 따라 걷는데 내가 이런 곳에 살았나 싶더군.

 

 엘론드의 눈길이 자신을 창틀과 몸 사이에 가두어 놓은 흰 발등 위로 떨어진다. 푸르스름하게 비치는 혈관에는 아마 피를 먹고 생겨나는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창틀을 붙잡은 손이 파르라하게 떨린다. 스란두일이 목청껏 웃는 소리에 엘론드는 얕은 숨을 들이킨다.

 “그 남자와 만나는 건 즐거웠나? 날 버릴 준비가 충분히 되었느냔 말이야.”

 뱀같은 손. 뱀처럼 느리게 몸을 감은 팔이 허리를 붙들고 갈비뼈 아래의 온통 빈 물컹한 내장을 잡아당겨 안았다. 나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눈치더군. 그 남자. 응? 내장이 아직 거기에 있던가. 오랫동안 수세기동안 음식을 담지 않았던 내장들이 혹여 썩어문드러졌기 때문에 스란두일의 팔 안에서 빈 몸통이 이그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엘론드는 눈을 감는다. 입술 사이로 새어나온 숨에 색이 없었다. 창가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들의 손이 닿는 곳도 입김이 닿는 곳도 온도로 누그러드는 것은 없었다.

 “내가 말했지 않나.”

 “난 아무데도 못 간다고.”

 “그래.”

 “자넬 그렇게 만들고는 어디에도 못 간다고도 했지.”

 “영리하군.” 

 몸을 감싼 팔등,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흰 팔뚝 위에 가늘게 떠는 손을 얹는다. 어깨위로 내려앉는 스란두일의 턱을 빗겨 두 팔을 젖히자 두 팔은 벗은 허물처럼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묵은 허물처럼.

 

 “자네는 어디까지 자네를 잃을 셈인가.”

 “네가 날 사랑할 때까지.”

 그는 창 밖에서 익숙한 잿빛 눈을 본다. 커튼을 닫는다.

 

 

 “떠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는 스란두일의 품을 헤치고 나와 소파에 앉는다. 천은 군데군데 떨어져나가고 얇고 낡은 솜들이 난롯불 앞에서 노랗게 익었다. 따듯하게 지핀 장작불이 식은 손 끝을 덥히지 못한지도 오래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난롯가의 허름한 소파에 앉는다. 수세기 동안 인간으로 남은 습관처럼. 마치 연기가 피는 굴뚝만이 사람들의 집 사이에 자리 잡은 그 집을 사람의 집처럼 만들었던 것처럼.

스란두일은 창을 등지고 선다. 남자가, 길 갈라드라고 불리는 남자가 엘론드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오래 전부터 체링크로스가를 따라 광장으로 나서는 남자를, 깃이 얇은 신사용 코트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을 창가에서 지켜보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엘론드도 남자가 그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알지 못했다. 상냥한 잿빛 눈. 신사용 코트에 어울리는 곧게 선 등. 처음으로 길갈라드를 거리 위에서 마주쳤을 때, 남자는 숙녀용 양산이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길고 아름다운 하늘색 상자를 들고 빈손으로 가게에 들어서는 엘론드를 위해 문을 잡고 있었다. 단순히 그 뿐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랬지.”

 그는 여러 번 상처가 아물었던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수차례 상처가 아물었던 것처럼 수차례 떠날 생각을 했다. 스란두일이 나서지 못하는 날에. 우묵하게 패인 거리에 쏟아진 햇빛이 여전히 발치에서 흔들리는 저녁을 틈타서 여러 차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은 없었다.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간다는 거짓말에도 스란두일은 보란 듯이 속아넘어갈 것이었으나, 거짓말을 해본적도 그를 속이려고 든 적도 없었다. 떠남은 타는 난롯가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팔걸이에 흩으며 누워있는 그림자 앞에서 녹아있었다. 마치 그들에게 시계가 없듯이 떠난다는 말도 홀연히 사라졌다.

 “자네가 자네를 잃어버린 것처럼.”

 얇은 셔츠가 창틀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스란두일이 창가에 기대어 서있던 몸을 세우기라도 한 것 같았다. 자네가 자네를 잃어버린 것처럼. 어디에 흘리고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란두일이 그를 잃어버린 것처럼 엘론드도 아마 그의 뱀 같은 팔에 휩쓸려서 어딘가에 자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끝도. 시작을 잃어버린 것처럼 끝도 어딘가에 녹아서. 





-

The Gaslight Anthem (가스등 송가) 제목은 모님이 붙여주심. 책으로 내게 되면 쓰고 싶었던 디테일을 좀 더하고 스란두일과 엘론드가 처음 만난 장면, 길갈라드가 엘론드 정체를 파헤치는 부분이 추가된 얇은 중철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책으로 낼지는 잘 모르겠어서 (어차피 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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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깊어도 별이 아득하게 흐려지던 날이 길었다. 추위에도 아픔에도 굳게 견디도록 태어난 요정의 몸에도 찬기운이 뼛속까지 시리게 들던 잠자리가 길었다. 어릴 적에나 보았던 것 같은, 요람에 누운 형제와 본 것만 같은 얇고 투명한 침막도 볕드는 창도 없었다. 얇은 침막 대신 기울고 가문 나뭇가지들로 뒤덮인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면 한기로 가누기 힘들어진 작은 몸을 바싹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빛에 녹을 새라 볕 드는 돌길을 피해 하루를 더 걸으면 밤새 멀리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별을 헤아리는 것이 요정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일이라는데에도 그 별을 헤아리는 일조차 못할만큼 슬픔에 잠긴 표정을 헤아리는 날이 더 많았다. 





 “아가야.”


 “페레델.” 


  소스라치게 놀란 눈으로 번쩍 깨어 몸을 일으킨 엘론드는 두 손으로 침대보를 우그러지게 쥐고 있었다. 밤을 식히던 미풍도 덜자란 아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식혀주지는 못했다. 길고 큰 그림자가 빛을 등지고 발치에 앉아 자그맣게 떨고있는 발목을 느리게 잡았다. 길갈라드는 자상하게 웃는다. 마에드로스도 마글로르도 아이가 자라면서 오랫동안 보아온 그들 주변의 어떤 요정도 저렇게 근심으로부터 벗어난 표정으로 다정하게 웃어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익숙치않아 아이는 되레 놀라 나지막하게 미소 짓는 대왕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다. 

 길갈라드는 그런 아이의 머리 위에 크고 단단한 손을 얹는다. 수차례의 기회에도 결국은 아이들을 되찾아 오지 못한 손으로 그는 아이의 검고 가느다란 머리칼을 느리게 헝클었다. 푹 수그린 고개를 느리게 들어올리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대왕은 조심스레 팔을 벌려 아이의 가느다란 몸을 안는다. 품에 안아도 한참이나 품이 남을 만큼 아이는 말랐고 그만큼 조심스러워졌다. 

 익숙치 않은 애정에 아이는 조심스럽게 등을 말고 몸을 굳힌다. 길갈라드가 아이를 안은 품에서 조금이라도 몸을 떨어트리려고 하는 듯이. 한참이나 그렇게 놓아주지 않고나서야 아이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옷깃을 쥐었다. 작은 손에서 나오는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제아무리 요정의 천이라고 한들 잔뜩 구김이 간 옷을 내일 아침 제대로 입을 수는 없을 터였다. 오래, 별이 조금은 움직였을 무렵에야 아이는 긴장을 풀고 너른 어깨에 악몽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기댔다. 여전히 가쁜 숨소리가 색색거렸고 아이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아이는 여전히 다시 잠에 들지는 못한 것 같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 몰라도 길갈라드는 엘론드가 꾸는 악몽이라면 작은 아이가 겪을 수 있는 수많은 두려움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들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어림짐작한다. 아이를 안은 팔이 무거워 조금이라도 자세를 바꿀라치면 매섭게 옷깃을 꽉 붙드는 손길이 옷자락 너머로 느껴진 탓도 있었다. 

 길갈라드의 목소리는 낮고, 다정하다. 마글로르의 노래를 듣고 자란 아이에게는 그다지 특별 할 것 없는 노랫소리였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느리게 아이의 등을 도닥이면서 작게 귀에 속삭인다. 두려움 없는 놀도르의 노래라고 하기에는 너무 상냥했고, 힘있고 낮은 그의 목소리로 부르기엔 지나치게 단조로웠으나 아이는 이해한 듯싶었다. 엘론드는 그의 목소리에서 흐림없이 뻗어나오는 상냥함을, 걱정과 애정을 읽는다. 대왕의 노랫소리는 노래보다는 속삭임에 가깝고, 속삭임보다는 오래된 주문을 외는 것처럼 단조롭다. 잘게 떨리던 아이의 등이 잔잔히 가라앉는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 마라.” 




-

몽골 자장가. Buevein d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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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귀향

from archive/Tolkien 2013. 12. 30. 01:04





회색항구에서 출발한 배는 오래도록 서녘을 향해 나아갔다.

머리 위에서는 수부 에아렌딜의 배가 수차례나 하늘을 가로질렀고 엘론드는 몇 번이나 아버지의 별이 뜨고 졌는지 셈하기를 그만 두었던 차였다. 가운데 땅은 멀어져 요정의 눈에도 회색 항구가 보이지 않게 될 무렵에, 반지의 주인 되는 요정들은 반지의 빛이 꺼져감에 따라 그들이 얼마나 아만 땅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지를 가늠했다. 그들은 이제 영주도, 안주인도 아니었다. 다스려야할 요정도 다스릴 영지도 없는 요정 영주들의 힘을 잃은 반지는 별빛에 닿을 때에만 이따금 빛이 일렁거렸다.

 

다스려야할 요정은 이미 가운데 땅을 떠났고 다스려야할 영지도 가운데 땅에 남아 반지는 가운데 박혀있는 푸른 보석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쓸모도 없는 물건이 되었으나 그는 긴 여행 내내 손에 걸린 반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로드, 엘론드! 손가락이 아홉 개인 호빗이 그렇게 외쳤을 때에서야 엘론드는 반지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가까워지는 해안선을 응시했다. 임라드리스의 흰 깃발을 가지고 떠난 요정들이 가지고 떠났던 깃발을 들고 배를 맞이하고 있었다. 뱃머리에 조각된 백조의 날개는 긴 여행의 풍파로 날개 끝이 닳아 없어졌을 즈음이었다.

! 로드 엘론드의 탄성을 빼앗아 간 것은 로스로리엔의 여군주였다. 엘론드는 그녀의 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요정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먼 곳에서, 반지에서 눈을 떼어 해안선을 바라보았을 때부터 엘론드가 말도 숨도 내뱉지 못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점이었다.

 

장신의 거구, 말 한마디 없이도 느껴지는 위압감을 뒤로하고 그의 표정은 말 할 수 없이 온화했다. 그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아만에서 가장 작은 키를 가지고 있게 될 두 호빗에게 손을 뻗어 배에서 내려주고는 엘론드에게 손을 뻗었다.

 

너무 늦었구나, 페레델.”

 

로드 엘론드를 페레델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가운데 땅에 없었다. 길갈라드가 가운데 땅을 떠나기 전에도 엘론드를 반요정이라는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요정도 놀도르의 마지막 대왕뿐이었다. 비록 마에드로스 형제의 손에 자라난 소년에 불과했을 때에도 엘론드 형제의 피 안에 들어있는 모든 혈통과 모든 계보에서 오는 영광과 슬픔을 반요정이라는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위엄을 가진 사람은 고작해야 길갈라드 뿐이었다.

 

전하께서 너무 일찍 떠나신 겁니다.”

 

채 배에서 내리지 못한 요정들을 대신해 길갈라드는 엘론드를 재촉했다. 고스란히 반지가 끼워진 손을 당겨 발라와 엘다르의 땅 위에 반요정의 두 발이 디뎌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놀도르의 젊었던 왕의 입가에 느리게 미소가 번져나갔다. 인간의 시대를 배웅하여 그 다리를 건네어 주고 온 엘론드가 젊은 페레그린 툭처럼 여겨져도 이상할 것 없는 곳이 아만이었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던 그의 대왕은 여전히 젊었고 여전히 온화하게 웃었으며, 페레델의 손을 잡듯 여전히 큰 손으로 엘론드의 손을 쥐었다.

 

임라드리스의 흰 깃발. 아르웬을 앞세워 보냈으나 결국 그의 딸만이 필멸이 되어 돌아온 여행에서 먼저 떠난 요정들이 임라드리스의 길고 흰 깃을 내세워 앞섰다.

 

드디어.”

 

탄식처럼 엘론드가 말을 내뱉었을 때 길갈라드는 고개를 꼿꼿이 세워 흰 깃을 보고 있었다. 마에드로스 형제의 손에서 구해내 작기만 했던 반요정 페레딜의 깃발. 깃은 엘론드 만큼 희었고 그가 뜻하는 만큼 은은하게 반짝였다. 요정의 기술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반짝이지 못했을 깃발이었다.

 

맡기신 것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길갈라드 그가 가운데 땅을 떠나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아만의 시간은 모호하기만 했다. 시절처럼 이미 겪을 수 있는 모진 비극을 다 겪은 요정과 신의 땅은 태초에 엘다르 만이 있었던 아르다처럼 온유하고 아늑했다. 삶이 무던할수록, 길갈라드가 겪은 모든 전쟁에 비할수록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시간은 모호하고 느리게 흘렀고 길갈라드는 그것을 알고서도 셈하지 못할 만큼 오랫동안 마지막 배를 기다려 왔을 것이었다. 길갈라드는 페레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분명 갓 어른이 되었을 때 건넸던 빌랴는 수차례의 전쟁과 고초로 주름지고 다져진 완연한 요정의 손에 끼워져 있었다.

 

돌려줄 것 없다.”

전하.”

내가 아니라 네가 가지고 돌아 온 것에는 그만한 의미가 있겠지.”

 

오히려 짐을 맡기고 떠나 미안했다는 말은 차마 건네지 못했다. 그것을 언젠가 돌려주어야하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탑의 눈에서 감추고 지켜왔을 반요정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수많은 요정들 중에 드물게 앞을 보는 재능을 가진 젊고 어린 반요정이 놀도르의 대왕조차 떠나게 만든 가운데 땅의 풍파 속에서 얼마나 위태롭게 견고한 벽을 쌓아 올렸는지도 몰랐던 바가 아니었다. 칼을 들면서도 치유사라고 불리워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타고난 핏줄로 인해 치유해야할 것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마지막 배로 돌아온 반요정에게 차마 지나간 일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길갈라드는 느리게 상처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은 엘론드의 손등을 쓸다 힘을 주어 손을 쥐었다. 요정의 행렬은 여전히 희고 푸른 깃발을 세우고 아만 한 가운데 요정들의 터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페레델.”

예 전하.”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에서는 더 이상 전하라고 불러선 안 될 거야. 가장 높은 요정왕도 발라도 계신 곳에서 감히 내가 전하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길갈라드는 반요정의 손을 꼭 쥐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음악으로 흘러넘치던 린돈의 도시를 산책하던 때처럼. 아이의 손은 성인의 것 이상이 되었고, 그의 반요정은 젊다고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땅의 현자와 비슷한 것이 될 만큼 시간이 흘렀으나 손만큼은 여전히 길갈라드의 한 손안에 쥐이고도 남을 만큼 작았다. 신다르와 인간의 피가 섞인 엘론드가 놀도르의 마지막 대왕이었던 요정보다 기골이 장대해질 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면.”

 

그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그의 페레델을 돌아보고 웃었다.

 

알면서 뭘 묻나.”

 

에레이니온.”

 

그 오랜 세월의 그리움을 뒤로하고도 조용히 짓궂은 웃음을 짓기 만 했던 장신의 요정은 드디어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엘론드와 길갈라드를 에워쌌던 요정들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아만에서만큼은 여전히 젊고 어린 놀도르의 마지막 청년왕을 뒤돌아봤다. 로스로리엔의 마님이 뒤를 따르다가는 소리 없이 웃었다.

 

 

엘론드. 잘 돌아왔다.”

 

나의 페레델! 가운데 땅에서 태어난 요정 가운데, 가운데 땅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요정 영주는 아만에 닿아서야 비로소 젊은 청년 왕의 젊은 책사로 돌아갔다. 필멸의 삶을 택한 운도미엘도 사냥감을 찾아 헤메이느라 목 축일 새 없는 그의 아들들의 생각도, 그의 왕 곁에선 젊은 책사로 돌아갔을 때에 만큼은 얼마간 잊을 수 있었다. 청년왕은 여전히 온화했고, 반요정의 손에는 왕이 물려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며 임라드리스의 깃은 여전히 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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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 드린 리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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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rchive/Tolkien 2013. 6. 13. 16:13

*롤리타au, 스란엘 등 끼얹을 가능성 농후




6. 

 젊은 언어학자는 소년이 학교에 간 사이에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짙은 오크색 책상 위에는 쓰다 만 종이들이 구겨져 널려있다. 타이핑을 하다 버린 종이들은 대개 만년필의 잉크 농도를 조절하는데 쓰인 듯 곳곳에 검은 잉크물이 번진 자욱을 가진다. 책상에는 그 밖에도 성인 남자의 손으로도 한 손에 들기 어려울 만큼 되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책들이 흰 속살을 드러낸 채 겹겹이 쌓여있다. 길갈라드는 그것들을 뒤적인다. 이 책의 어느 줄을 한 손으로 짚고 무언가를 골똘히 적어나가다가 부스럭 거리며 다른 책의 어귀로 옮겨가는 식이다. 흰 셔츠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있고 옅은 베이지색의 베스트는 등이 의자에 닿을 때마다 구겨진 자국이 고스란히 남는다. 

 만년필의 펜촉은 팔에 힘을 주어 알파벳의 세로행을 그어 내릴 때 마다 간드러지는 소리를 내며 종이를 긁는다. 세입자는 버석한 종이 소리 사이에서 드문드문 이어지는 집주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는다. 마글로르는 짧은 단어로 여러 번에 걸쳐 숨을 내쉬며 대답하고 비교적 자주 침묵을 지킨다. 길갈라드는 마글로르의 잦은 침묵에서 어렴풋이 그것이 중요한 전화임을 추측한다. 때로, 이 집에서 젊은 세입자의 생활은 많은 것을 추측함으로서 이루어진다. 

 계단을 밟는 걸음소리에서부터 길갈라드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다시금 추측할 수 있다. 집안의 모든 계단과 나무판자들은 맞물린 채로 낡아 조금만 움직여도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길갈라드씨.」

 마글로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길갈라드의 이름은 어딘가 어색하다. 마글로르는 매 번, 매 회 길갈라드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치 새 학기 첫날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할지 몰라 헤메는 선생처럼 발음한다. 이름 뒤에 붙는 존칭에서 그가 ‘씨’와 ‘미스터’사이에서 꽤나 고민했음을 길갈라드는 어렵지 않게 엿본다. 문고리를 잡고 밀면 느리게 안쪽을 향해 열리는 문을 열고 마글로르는 모습을 드러낸다. 길갈라드는 어설픈 자세로 일어서 마글로르를 맞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두 사람이 소년과 가지는 관계보다 훨씬 어눌하다. 

 마글로르는 길갈라드에게서 세입자와 집주인의 관계를 찾기보다 자신이 일궈내지 못한 엘론드와의 관계의 흔적을 좇는다. 흔적들은 부드럽지만 얄팍하고 나른하다. 그들의 관계에서 남은 흔적은 마치 입 안에서 레몬사탕을 굴리면 사탕이 혀끝에 달라붙어 맴도는 끈적임과 유사하다.  

 「용건 있으십니까?」

 길갈라드는 세입자답게 정중하다.

 「다른 게 아니고.」

 마글로르는 잠시 뜸을 들인다. 길갈라드의 품에 안겨있는 소년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한참을 망설이는 때와 같은 표정을 짓는다. 

 「급히 형에게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하루만 엘론드를 봐주실 수 있을까 해서.」

 길갈라드는 마글로르의 표정에 숨어있는 부끄러움을 읽는다. 마글로르는 자신이 길갈라드에게 소년을 부탁하는 입장임에도 소년이 자신보다 훨씬 길갈라드를 기꺼워 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리고 길갈라드는 마글로르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음을,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까지도 어렵지 않게 알아챈다. 이 집에서 세입자의 생활은 많은 것을 추측함으로서 이루어진다. 길갈라드가 처음 마글로르와 양아들의 관계에서 어떠한 추측을 이끌어냈음과 같다.

 「저야 엘과 지내는 거라면 언제든.」

 마글로르는 잠시 말없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그는 말 대신 크지 않은 동작으로 길갈라드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길갈라드는 문을 닫는 마글로르의 어깨 위에서 짙은 패배감을 읽는다. 길갈라드는 문득 자신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음을 안다. 그의 발목은 얕은 슬픔에 잠긴다. 아, 이 얼마나 추악한가.


7.

 소년이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의 시간 동안 길갈라드의 책상 위에는 오로지 그만을 위해 준비된 식사가 자리를 차지한다. 두껍께 썰어놓은 빵 사이에 끼워진 햄과 체다치즈, 토마토를 으깨어 만든 샐러드 위에 질척한 드레싱이 뿌려져있다. 길갈라드는 그릇을 완전히 비우고 커피 잔을 들다가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는다. 완전히 양복을 갖추어 입은 마글로르는 마글로르의 얼굴에 떠오르는 짙은 패배의 흔적, 해묵은 피로감 같은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길갈라드는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를 찾아 몸을 뒤척인다. 창문 너머로 그네의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흘러든다. 아래층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는 20년 전의 어느 단명한 여가수의 목소리다. 여자는 서글픈 뱃노래를 잘 부른다. 오랜 시간을 뱃사람으로 살아온 숙부 키르단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이다. 길갈라드는 천천히 몸을 덮쳐오는 햇살 속에서 눈을 감았다가 세차게 울리는 전화벨에 눈을 뜬다. 그는 자신이 얼마간 잠들어 있었음을 노곤하게 밀려오는 두통으로 인해 깨닫는다. 전화벨은 멈추지 않고 울린다. 길갈라드는 느린 발걸음으로 층계를 내려간다. 

 「마글로르씨 댁입니까?」 

 「그렇습니다.」

 「마글로르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길갈라드는 잠시 망설인다.

 「세입자입니다만, 먼 친척 됩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긴 숨을 토한다.

 「거 참. 어렵던 와중에 잘 됐습니다.」




-

업데이트가 너무 없어서 우선 써놨던 분량이라도 올립니다. 머릿속에 전개는 있는데 연계성이 쓰러지지 않아..

모나 역의 스란두일이 얼른 쓰고싶다 :Q.. 롤리타 전에 올렸던게 2월이라니 말도 안된다....으어어 분명히 롤리타를 가져왔던거 같은데 안가져왔나봐요...하고 좌절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신간 거지같아서 글쓰는데 도움 안된다고 안가져왔었지 참...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어요@midair_meron 추가해주실분이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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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엘] 롤리타 1

from archive/Tolkien 2013. 2. 7. 16:07

*롤리타au, 스란엘 등 끼얹을 가능성 농후




0.

 요정의 인상착의를 적어둔다. 키는 4피트 반에서 5피트 사이. 대략적으로 추측컨대 4.7피트 정도라고 해두자. 머리칼은 짙은 흑색. 피부는 깨끗하고 투명하다.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특이한 반점이나 흉터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나오는 요정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주근깨도 장난스럽게 일그러지는 눈물점도 없는 희고 깨끗한 살갗이다. 이따금 새벽 어스름의 푸른 빛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인어의 피부처럼 창백한 푸른색으로 보인다고 덧붙인다. 눈은 희미한 잿빛. 가끔 글자를 읽어 나갈 때면 희미한 불꽃이 타오른다. 대체로 이 작은 요정의 홍채는 부드럽게 풀어져 먼 곳을 바라본다. 손발은 작고 희다. 손가락은 가늘고 길며 끝이 야무지고 손바닥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포동포동한 살 대신 부드러운 곡선과 주름으로 이루어진다. 발은 같은 키의 또래에 비하여 손가락 반 마디만큼 작다. 새 신발을 살 때마다 그의 발에 맞는 신발을 사기 위해 애를 먹은 기억이 난다. 발목은 가늘고 여려 성인 남자라면 한 손으로도 쥘 수 있을 정도다. 검은 옥스퍼드 슈즈를 신기면 탁, 탁하고 새의 작은 발소리를 흉내 낸다. 어느 무대 위의 탭댄서도 그 가냘프고 가벼운 움직임을 흉내 낼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푸른 셔츠 아래로 비치는 견갑골은 우묵하게 얕은 그림자를 만들고 덜 자란 뼈마디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헤아릴 수 있다. 부드럽게 둥근 척추를 문지르며 더듬어나가면 간지러운 듯이 허리를 한쪽으로 접으며 등을 오목하게 휜다. 동그랗게 패인 배꼽은 여린 붉은 살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마도 열매의 꽃받침이 붙어있던 자리가 그렇게 생겼으리라.



1.

「엘론드. 손님 좀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니.」 

 집주인은 불타는 붉은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길갈라드는 그와 같은 먼 친척이 있다는 사실도 숙부 키르단에게 전해들은 뒤에야 알았다. 집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대체로 두 사람에서 네 사람이 살기에는 알맞은 크기처럼 보였다. 집주인 마글로르의 표정은 길갈라드를 반기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달리 홀대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길갈라드는 이처럼 무표정하고 살갑지 못한 집주인의 집에서-아무리 친척이라 하더라도-지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이내 생각을 거둔다. 마글로르의 모습 뒤로 나타난 소년은 눈만 끔벅인다. 맨발로 차박차박 복도를 걸어 나와서는 길갈라드를 훑어보곤 그저 무심하게 근방에 놓여있는 양아버지의 구두를 신는다. 발을 옮길 때마다 구두가 껄덕거린다. 검은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발을 옮기는 소년은 풍채 좋은 양아버지의 어디도 닮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소년은 작은 발에는 아직 큰 구두를 벗었다가, 다시 신었다가, 다시 발끝에 걸고 탁탁 털어내는 사이 길갈라드는 엘론드가 하는 양을 문 앞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엘론드는 복도를 반쯤 걸어가고 나서야 손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뒤를 돌아본다.「이쪽이에요.」말소리에는 높낮이가 없다. 길갈라드는 작은 집주인이 걷는 대로 속도를 맞추어 차근히 복도를 걷는다. 작은 집주인은 오른쪽 신발이 벗겨져 나가 콩콩거리며 돌아와서 다시 신발을 끌며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기 시작한다. 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무릎부터 들어 올려 구두의 앞코를 겨우 층계에 걸쳐 올린 뒤에 다리를 주욱 끌면 구두굽이 층계참에 걸린다. 「엘론드.」아래에서 마글로르의 목소리가 소년을 부르지만 소년은 뒤에 선 손님의 얼굴을 훑고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신발을 끌었다. 손님은 소년을 지나치지도 서둘러 재촉하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소년이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는 것을 기다린다. 옷가지와 서적이 가득 든 네모난 여행가방 덕분에 길갈라드의 팔이 슬며시 저려와도 길갈라드는 소년이 한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다음 계단을 밟는다. 소년의 희고 가느다란 다리가 진흙탕 속을 힘겹게 걷는 것처럼 느린 근육 운동을 하는 것을 그는 말릴 생각이 없었다. 길갈라드는 소년의 발에 신긴 구두가 계단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르는 사이 계단에 깔린 때타고 낡은 붉은 러그를 바라본다. 손톱 마디만큼도 되지 못하는 투명하고 작은 거미가 천천히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엘론드는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는 변덕처럼 아버지의 구두를 모두 벽에 부딪히도록 벗어놓고 난간을 쥔 채로 좁고 짧은 복도를 걷는다. 말없이 눈짓으로만 손님이 머물 방을 가리켰을 때, 길갈라드는 한참이나 멍청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어린 아이에게 혼나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여행 가방을 고쳐쥐고 잰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방 안은 지저분하고 정겹다. 낡은 카페트는 이곳저곳 커피나 짙은 색의 액체가 쏟아진 흔적들이 남아있고 책장은 제때 잘 닦아주지 않은 듯 나무 광택 대신 곳곳에 나무결이 헤진 흔적들이 보인다. 길갈라드는 책상 위에 안개처럼 쌓인 먼지들을 손바닥으로 훑어낸다. 작은 집주인은, 큰 집주인 보다는 집에 새로운 식구를 받아들이는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깨죽지를 완전히 덮은 교복처럼 넉넉한 흰 셔츠를 입고 맨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서가의 먼지를 불거나 쓸어보며 방을 배회하다가 변덕처럼 그가 좋을 때에만 얼굴을 돌린다. 칠이 벗겨져 드문드문 검게 삭은 속살이 드러나는 창 너머로 흰 햇살이 부서져 소년의 얼굴 위로 쏟아진다. 소년은 한쪽 눈썹만을 찡그리면서 말한다.

「마글로르가 카페트는 조만간 새걸로 바꾼다고 했어요.」

 그의 말에서는 ‘그렇게 전하랬어요’하는 어른의 주문이 그대로 엿보인다. 엘론드는 다시 얼굴을 돌리고 발바닥으로 카페트를 이리저리 밟으며 이제는 타인의 방이 될 방 안을 걷고, 뛰고, 날아다닌다.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카페트의 끄트머리만 밟았다가 다시 온 발바닥으로 얼룩을 문대고 작은 입술로 온 방 안의, 모든 창문 틈의 먼지를 불어낼 것처럼 군다.


 「저기는 제 방이고요.」

 길갈라드는 새카만 밤을 닮은 검은 단발머리가 소년의 목덜미를 스치는 찰나를 눈에 담는다. 엘론드는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손으로 곧 길갈라드의 방이 될 방의 건너편에 있는 문을 가리킨다. 흰 칠이 벗겨진 문의 문고리를 문에 매달려 돌리고 소년은 문을 반 뼘만큼만 열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길갈라드는 꼭 저렇게 문을 열어야 하는지 어른 된 마음으로 소년이 하는 양을 조용히 관찰한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엘론드는 한참이나 길갈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얼굴이 딱 반절만 드러나 길갈라드의 눈과 마주쳤다가, 곧 문이 닫힌다. 낡은 문에서 흔히 나는 크고 삐걱대는 소리다. 기름을 사다가 경첩에 발라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길갈라드는 여행 가방을 먼지 앉은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잠시 무언가에 홀렸던 듯하다. 



2. 

 요정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과도 다르고 셰익스피어의 퍽(Puck)과도 다르다. 뭇 작가들이 말하는 어린 님프, 요염하고 유혹적인 님펫들과도 다르다. 대개의 요정들은 처연한 슬픔에 목말라있다. 열두살에서 열다섯살, 많게는 겨우 열일곱에 다다르는 나이에 그만한 처연함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온 몸을 흐드러지게 무너트리는 슬픔이란 겪기 힘든 일이다.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요정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 요정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최근에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사람이거나,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 이거나, 깊은 슬픔으로 분노에 잠겨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는 요정을 알아보고야 말았다. 



3.

 마글로르의 하숙인이 된 길갈라드는 곧, 마글로르와 엘론드가 그렇게 친한 부자사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소년은 늘 양아버지의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면서도 막상 마글로르가 이름을 부르면 두 걸음 이상의 거리를 두고 다가간다. 아버지의 튼튼한 팔을 붙들고 매달려 그네를 타는 일도 무언가를 만들어달라고 발을 구르는 일도 없다. 말없이 아버지를 부를 때에는 꼭 두 걸음 만큼 뒤에서 마글로르의 옷깃을 붙잡는다. 마글로르는 익숙한 몸짓으로 전화를 하거나, 가계부 위를 꼼꼼하게 채우다가 엘론드를 돌아본다. 「엘론드.」이름을 불리워도 소년은 대답하지 않는다. 소년은 냉장고를 가리키거나, 발로 바닥을 두 번 동동 구르고 문 밖을 가리킨다. 그의 양아버지는 소년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마치 작은 집주인에게 세를 들어 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또는 크게 빚진 것을 갚는 부모처럼 서둘러 전화를 내려놓고 냉장고 안에서 시원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내어주거나 소년의 발에 흰 운동화를 신겨 끈을 묶어주곤 놀다오도록 현관문을 열어준다. 현관문을 열어주기 전에는 꼭 손가락을 접어 시간을 알려준다. 엄지와 검지를 접어 셋을 말하면 오후 세시까지는 집에 돌아올 것, 새끼손가락을 펼치면 친구의 집에 폐가 되지 않도록 저녁 식사 시간 전에는 돌아올 것 등. 

 손님은 그 모든 조용하고 음울한 부자의 관계를 2층의 계단 난간 위에 몸을 기대고 지켜본다. 부자의 관계는 어설프다. 마글로르는 소년에게 최대한의 부모노릇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엘론드는 그에게 친자식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길갈라드는 난간 위에 내려놓았던 머그컵을 들고 방으로 들어선다. 집에 소년이 없는 시간만이 그가 집중해서 일을 마칠 수 있는 시간이다. 소년을 내보낸 양아버지는 현관의 깔개 위에 소년에게 손가락을 접어 시간을 알려주던 자세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문 밖을 내다본다. 바람이 일 때마다 붉은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에 손님은 관심이 없다.



4.

 소년은 동화 속에서 나온 요정보다도 훨씬 못한 교태와 애정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어설픈 손짓과 꾹 다물어버리는 옅은 분홍빛의 입술. 소년은 길갈라드가 안경을 쓰고 타이포에 집중할 때에만 방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살그머니 발꿈치를 들고 들어와 서가에 꽂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도미노처럼 넘어트리고는 그 사실을 길갈라드가 알아채기 전까지 다시금 문틈에 숨어 젊고 잘생긴 손님을 지켜본다. 엘론드는 이따금 그의 눈길을 사로잡고 싶은 것처럼도, 단순히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 것처럼도 보였다.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리면서 문 틈사이로 엿보는 눈과 마주치면 소년은 그제서야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는다. 아마도 쑥스러운 마음에 탁 소리가 나도록 재빠르게 문을 닫고 싶었겠지만 여전히 기름칠이 되지 않은 문은 삐그덕 거리면서 영 엘론드가 원하는 때에 맞추어 제대로 닫혀주지 않는다. 길갈라드는 타이포 위에 놓여있던 종이를 빼 잉크로 한켠에 종이를 눌러놓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전히 문고리와 씨름을 하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결코 서두르거나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카페트를 디뎌 소년이 손으로 쓰러트린 책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엘.」

 엘론드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민다. 길갈라드는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단순히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책을 밀어 넘어트리는 그 몸짓이 소년에게 그리 재미있는가 싶어 이름을 불러보는 것뿐이다. 

 

 날이 지나면, 소년은 천천히 방문을 열고 드나들기 시작한다. 손님의 서재 겸 침실과 아이의 침실은 마치 처음부터 문이 없었던 것처럼 이어져있다. 길갈라드가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거나,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등을 뒤로 약간만 기울이면 온통 하늘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아이 방이 들여다보인다. 소년은 결코 그 나이에 걸맞는 분주함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엘론드는 침대 위와 카페트 위를 뒹굴며 책의 삽화를 넘겨보고, 다시 처음부터 작은 목소리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소리 내어 읽는다. 무뚝뚝하고 높낮이가 없는 어리고 처연한 목소리로 동화책에 나오는 옆집 아주머니 역의 대사를 읽는 소년은 사랑스럽다. 세상의 모든 레몬맛과 라즈베리맛 캔디를 소년의 방 안에 가득 깔아주고 싶을 만큼 소년의 색채는 옅고 우아하고 사랑스럽다. 

 카페트 위에 배를 깔고 누워있던 엘론드와 눈이 마주치면, 엘론드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어느 날은 자신의 방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어느 날은 길갈라드의 서재 구석에 놓인 푹신한 소파 위에 두 다리를 모두 옹송그리고 앉아 바닥에 굴러다니는 신문을 주워 읽는다. 

「의원은, 의장에게, 반론을, 제기했다.」

 소년은 소파 위에 올라간 두 다리로 팔걸이를 톡톡 찬다.「의장이 뭐에요?」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해 본 뒤에야 묻는 얼굴을 보면서 길갈라드는 웃으며 손짓을 한다. 

「이리 가져와봐. 엘. 」

「의장이 뭔데요?」

 엘론드는 팔걸이 위에 오금을 걸치고 길갈라드를 바라보다가 손짓만 되풀이하는 손님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참,」말 끝에 몽글몽글 퍼지는 한숨소리가 귀여워 길갈라드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웃는다. 엘론드는 헤진 민트색 소파 위에서 뛰어내리고 신문을 한 손에 든 채로 길갈라드에게로 걸어온다. 허리둘레가 조금 큰 반바지를 손으로 추스르고 책을 들고 있는 길갈라드의 두 팔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으면서 땅을 디디고 있는 성인 남자의 두 무릎 사이를 몸을 비틀어 열었다. 

 「의장이 뭔데요?」

 엘론드의 손에 들린 신문을 건네받는 동안 엘론드의 시선은 길갈라드의 손에 들려있던 책으로 옮겨간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듣는, 말을, 재-재분석, 하는 경향. 경향이 있다.」그 사이를 참지 않고 다시 책을 읽어나가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길갈라드는 한 손으로 소년의 허리를 번쩍 안고 허벅다리 위에 앉혀준다. 허공에서 흔들리던 발이 길갈라드의 무릎 뒤를 아프지 않게 찬다. 

 「의장은」

 그렇게 말을 꺼내면 소년은 다시 책의 구절을 짚는다.

 「듣는 말을 왜 재-재분석해요?」

 소년은 R발음을 아주 작게, 입 안에서 혀를 작고 동글게 말아 발음한다. 그리고 단어가 헷갈리는 듯이 두 번 말한다. 

 「엘.」

  길갈라드의 손에 들린 책을 빼앗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엘론드의 작은 어깨가 들썩이고,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마른 팔꿈치가 길갈라드의 가슴팍을 누른다. 민무늬의 얇은 여름셔츠 위로 소년의 팔이 스칠 때마다 길갈라드는 마른 입술을 축인다. 남색 반바지 아래로 비어져 나온 다리가 다시 이제는 리듬을 타는 것처럼 톡, 톡, 길갈라드의 정강이뼈를 두드린다. 한 단어를 읽을 때마다 한 번씩. 허벅다리 위에 불안하게 앉은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단단히 잡아 안으면 마디가 굵은 어른의 손 위로 작은 손이 돌아다닌다. 다 펼쳐도 길갈라드의 손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것처럼 작은 손을 엘론드는 둥글게 모아 손끝으로 두꺼운 뼈마디를 매만진다. 검지의 뼈마디를 이리저리 우그러트리고, 중지의 손톱을 결을 따라 문질러 본 다음, 새끼손가락을 손 안에 쥐고 이리저리 살결을 비튼다. 

 책의 무게가 슬슬 힘에 부쳐오기 시작하면 엘론드는 몸을 비스듬히 길갈라드의 품에 기대어온다. 길갈라드에게 책을 맡겨 놓고 몸에 힘을 뺀 다음 가슴께에 몸을 웅크려 기대고 손만 뻗어 책장을 하나, 둘 넘긴다. 소년의 살결에서는 달착지근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냄새가 난다.  

 「엘.」

 아이의 발가락이 발목부터 종아리를 느리게 문지르기 시작한다. 길갈라드는 참지 못하고 이름을 부른다. 창자 아래가 느리게 물이 끓듯 달아오른다.

 「읽는 중이에요.」

  소년은 귀찮다는 말투로 길갈라드의 목소리를 끊어낸다. 엷은 색소를 가진 눈이 부드럽게 활자를 보며 타오른다. 「일면, 릴리 여사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라틴어, 어-어형 변화, 변화표가 문법의 고유한,」「아름다움.」「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엘론드는 드문드문 문장을 이어 읽고 그렇지 않아도 아주 작은 얼굴 사이에서 고작 손가락 한마디도 되지 않는 미간을 잔뜩 지푸렸다가 천천히 편다.

「라틴어 할 줄 알아요?」

 길갈라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아이는 허벅다리에서 미끄러진 엉덩이를 재차 움직여 다시 허벅지 위에 올라앉는다. 곰실곰실한 손길이 양복바지 아래에서 직각으로 굽어진 길갈라드의 무릎을 둥글게 문지른다.

「조금.」

「가르쳐줘요.」

  길갈라드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낀다.

「마글로르씨가 라틴어를 잘 하는 걸로 알고있는데.」

  소년은 잠시 입을 닫았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버지한테는 싫어요.」

「엘.」

 색이 엷은 입술이 뾰로퉁하게 튀어나왔다가, 「엘?」하고 다시금 이름을 부르면 이번에는 허벅지 위에서 바닥으로 풀썩 뛰어내린다. 작은 발이 무게를 싣고 길갈라드의 발등을 찍는다. 아! 작은 비명을 지르는 사이 엘론드는 길갈라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에서 책을 빼앗아 표지를 덮는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갈피가 끼워지지 않은 채다. 힘껏 화가 났다는 표시를 내려고 온 몸으로 힘을 주어 걸어도 카페트 위를 구르는 발은 콩콩거리는 소리 밖에 내지 못한다. 

「엘.」

 소년은 아직도 답이 없다. 문 틀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문을 닫는다. 문의 경첩은 비스듬히 떨어져내려 제대로 아귀에 맞지 않고 덜렁거린다. 길갈라드는 한숨을 쉬고, 숨을 깊이 들이쉰다.

 「엘리.」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문틈 사이로 높은 소리로 내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엘론드?」아이의 신경질 적인 소리에 마글로르가 층계참을 반쯤 올라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지만 아이는 대답하지 않는다. 

 괜찮습니다. 내려가 보세요.

 길갈라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엘론드의 양아버지가 무슨 직업을 가졌던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단순히 소싯적에 라틴어와 관련된 언어에 능통했던 사람인 것만을 알고 있다. 오래전 키르단 숙부가 스치듯 일러준 것에 지나지 않다. 마글로르가 다시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리면 길갈라드는 몸을 일으켜 사무용 의자에서 일어선다. 엘론드가 찍어놓은 발등이 아릿하다. 

 「엘. 들어가도 괜찮니?」


 「안돼요.」


 「미안하다.」

 「안미안해 하셔도 돼요.」

  솔직하게 굽히고 들어가면 아이의 목소리는 풀이 죽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면 아이는 팔에 얼굴을 묻고 침대 위에 엎드려있다. 길갈라드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소년의 크림색 홑이불 위에 앉는다. 큰 손으로 엘론드의 등을 나른하게 문지르면서 단발머리가 스치는 목덜미를 바라본다. 아이의 머리는 또래에 비해 길다. 마글로르는 아이의 머리가 길도록 내버려 둔다. 

 「마글로르씨랑 싸웠니?」

 아이의 침묵은 낮잠만큼이나 길었다. 엘론드는 겨우 얼굴을 들고, 출렁이는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꼼지락거려 다리를 모으고 앉아 길갈라드를 바라본다. 「아니요.」그 다음에는 등을 쓰다듬는 팔 아래로 머리를 내밀고 가슴께에 뺨을 기대며 안겨온다. 

 「마글로르씨와 사이가 안좋니?」

 엘론드는 대답 없이 눈만 깜박거린다. 소년은 마글로르에게도 이렇게 안겨있는 법이 없다. 두 사람의 사이는 무어라고 말하기 힘든 긴장감으로 차있다. 엘론드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배우는 것 등 모든 종류의 것을 양아버지에게 의지하지만 마글로르를 보고 환하게 웃지 않았다. 엘론드는 주인에게 얻어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마글로르의 주변을 조심스럽게 맴돌고, 마글로르는 버린 개를 도로 주워온 주인처럼 엘론드의 주변을 맴돈다. 종종 아이를 품에 안고 마글로르와 눈이 마주치면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등줄기를 차갑게 식힐 정도였다.

 아이는 눈꼬리에 눈물이 질정도로 길게 하품을 한다. 잠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느리게 좌우로 흔드는 아이를 보다가 길갈라드는 아이가 편하게 기대어 앉도록 자세를 고쳐준다. 아이는 졸리다는 말도 없이 얕은 낮잠에 빠진다. 길갈라드는 팔 하나, 고개 하나, 다리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아이가 안겨있는 대로 오로지 아이의 단잠을 깨우지 않는 것에 집중한다. 아이의 입술에는 오전에 먹은 딸기물이 붉게 들었다. 


5.

 「엘, 가만히.」

 「간지러워요.」

 엘론드는 잿빛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허리를 접으면서 까르륵 웃는다. 듣기 힘든 웃음소리에 마글로르가 고개를 들고 아이를 돌아본다. 아이는 마치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길갈라드의 품으로 뛰어들어 안겨들고 한참을 더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거린다. 엘론드는 손을 뻗어 길갈라드의 입술에 물려있는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떨어트린다. 길갈라드는 입 안에 남은 연기를 공기 중에 흩어내면서 엘론드의 수영복을 고쳐 입혀준다.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매듭지은 리본을 한 번 더 양 끝으로 잡아당긴다. 흰 크림을 얼굴에 발라주면 살결이 이리저리 밀리는 것이 괴로운지 고개를 흔든다. 고개를 흔들어 손길을 떨쳐내도 길갈라드가 다시 뺨을 붙잡으면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차렷 자세를 하고 선다. 

 마글로르는 이번 여름에야 말로 엘론드를 보이 스카웃이나, 캠프에 보내려는 셈이었던 것 같지만 엘론드는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엘론드가 한번 고개를 저으면 마글로르는 힘없는 용사처럼 굴복해버린다. 길갈라드는 점점 그 두 사람의 묘한 무게중심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글로르는 얕은 호수의 맞은편에서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펼친다. 엘론드의 (그다지 친해보이지는 않는)학교 친구들, 그리고 몇몇의 부모들이 반대편에서 마글로르의 주변에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안가도 되겠니?」

 「괜찮아요.」

 「정말로?」

 「수영 하실거에요?」

 아이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기 시작했다. 그 쑥스러움이 그득 담긴 존댓말이 자신에 대한 약간의 수줍은 애정임을 길갈라드도 눈치 채기 시작한 터였다.

 「나는 여기 앉아있을 거야.」

 아이는 뺨에 과자를 가득 넣은 것처럼 부풀렸다가 뜨겁게 달궈진 돌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만을 교묘하게 밟고 호숫가까지 내려간다. 발끝만 살짝 담궜다가 곧장 온 발을 오므리면서 다리를 빼낸다. 

 「엘론드.」마글로르의 목소리는 낮고 슬프고, 엘론드의 앞에서만 가녀리다. 엘론드와 길갈라드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모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듯 마글로르는 잠시 말에 뜸을 들인다.「곧 점심이니까 무리하지 말아라.」「네.」소년은 친구들의 무리가 놀고 있는 곳에서 세네걸음 쯤 떨어진 곳에서 발로 물을 찬다. 길갈라드가 던져준 비치볼을 팔에 안고 물 위를 잠시 떠다니다가 곧 물가의 자갈을 뒤집는다. 이따금은 물 아래에서 개구리가 뛰쳐나와 엘론드는 얼굴에 잔뜩 튄 비리고 차가운 물을 흰 팔로 문질러 닦는다. 

 엘론드는 친구들 사이에서 겉돈다. 친구들은 모두 소년보다 키가 반 뼘 씩 크고 우아하고 느린 그 지방의 사투리로 이야기한다. 길갈라드는 엘론드의 말투가 이 지방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겨우 알아채곤,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아이는 양아버지의 밑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다른 아이들이 이 지방에서 나고 자라 충분히 익힐만한 사투리를 익히는데 걸리는 시간만큼은 여기서 살지 않았을 것이다. 엘론드는 아버지와 함께 이사를 왔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언어만큼은 표준어에 가까운 더 또렷하고 고저가 없는 말을 사용했다. 친구들은 때로 그 말투가 너무 젠 체를 한다고 수근 거린다. 엘론드의 말에는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지 않는 오래되고 낡은 어휘들이 섞여 들어간다. 그것도 아이들에게는 젠 체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마도 오래된, 요즘은 쓰이지 않는 말들은 한 때 라틴어에 아주 능했다는 아이의 양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것이다. 

 「엘론드.」

 길갈라드는 마글로르가 엘론드를 부르는 양을 지켜본다. 아이는 차가운 샌드위치를 하나쯤 집어 먹은 뒤에 반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긴 블루베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발간 입술과 흰 손 끝에 푸른 물이 드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손끝은 완전히 푸른 물이 들어 못된 장난을 하고 돌아온 아이의 전리품처럼 보인다. 엘론드는 아직 입술을 오물거리는 채로 흐르는 물가에 손을 가져다 대지만 물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파란 물을 들이고 마글로르를 돌아보면 마글로르는 이리 오라고도, 가서 놀라고도 하지 못하고 애틋하게 웃는다. 소년은 얕고 좁은 호숫가를 참방참방 물소리를 내며 걸어와 발치에 앉는다. 

 「엘?」

 소년은 물에 젖은 몸을 따듯한 돌 위에 앉아 말리다가 길갈라드를 돌아보며 웃는다. 그는 손을 뻗어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준다. 아이는 눈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사랑스럽게 눈을 두 번 깜박인다. 「물 들어갔니?」소년은 다시 말 없이 눈을 오랫동안 꾹 감았다가 뜬다. 완만한 경사가 진 비탈을 네 발로 천천히 기어와 길갈라드의 두 팔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고는 젖은 몸 그대로 길갈라드의 흰 셔츠를 끌어안는다. 

 「피곤하니?」

 아이는 흰 셔츠가 푹 젖도록 얼굴을 부빈다. 엘론드의 학교 친구들은 저들끼리 한참이나 더 물놀이를 하다가 길갈라드를 흘긋 바라본다. 아이들의 차가운 시선은 아주 잠시만 엘론드의 흰 등에 머물렀다가 사라진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물놀이하는 소리만 천천히 울려 퍼진다. 길갈라드는 소년이 얼굴을 가리우고 품 안에 웅크리는 이유를 알아챈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엘?」

 엘론드는 여전히 꿈적도 하지 않는다. 셔츠가 눅눅하게 젖어드는 느낌이 든다. 길갈라드는 곁에 놓여있는 크고, 따듯하고, 잘 마른 볕 냄새가 나는 타올로 소년의 몸을 감싸며 안아 일으킨다. 엘론드는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길갈라드의 셔츠를 손으로 힘주어 잡았다가 맥없이 손을 놓는다. 「감기 걸려」아이는 이번에는 대답 대신 목덜미를 끌어안아온다. 새처럼 가벼운 무게가 몸을 덮쳐와 길갈라드는 한참동안 말없이 아이의 무게를 지탱했다. 발치에서 펼쳐져 있던 책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길갈라드는 아이의 등을 안아들고 걸음을 옮긴다. 

 「돌아가자.」

 새순처럼 여린 입술이 뺨 위에 물 자국을 만든다. 길갈라드는 발걸음을 멈춘다.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어깨 위에 물기가 서린 얼굴을 애틋하게 묻어온다. 고장난 것처럼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는 길갈라드를 아이들의 눈이 좇아 붙는다. 고양이처럼 둥글게 말아올린 등, 팔 안에서 가볍게 움틀거리는 무게. 엘론드의 머리칼이 길갈라드의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묵직하게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욕망은 원초적인 신앙처럼 혈관을 구석구석 휩쓸고 지나간다. 

 새처럼 가벼운 몸이 끌어내는 온화한 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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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샬롯 마글 이야기로 넘어가면 될듯...와 어제 밤에 신나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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