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石仏

from review 2017. 2. 18. 23:32

[석불石仏]


머리가 찌근거리는 하늘 높은 날. 시골 자그마한 박물관. 기와가 무너질 것 같은 빨간 문을 넘어서자 머리가 서늘하게 미소 짓는다. 검게 그을린 석단 앞에 찡그린 얼굴로 서 있는 내 앞으로 머리만 덩그러니 당신이 고요히 미소 짓는다. 비 가리개도 없고 위엄을 지키는 울타리도 없다. 말라 비틀어져 서 있기도 힘든 잡초 위에 머리만 덩그러한 당신. 나는 당신을 뭐라 부르면 좋을까요? 매미도 울지 않는 여름의, 눈부신 빛 속을 나는 당신에게 다가간다.

(중략)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국 일본의 언어를 말하니 당신의 이름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도회인의 손을 가졌으니 당신을 흔들어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배를 타고 일본에서 왔다. 그 까닭에 이곳에서 때로 교토를 생각한다. 불국사를 보고 다이도쿠지를 생각한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일본을 틀림없이 알고 있으리라. 당신이 몸을 잃은 것도 코가 잘려나간 것도 그 나라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당신의 눈으로 그 나라의 인간이 이 나라에서 무엇을 했는지 봤을 터이다. 나는 일본에서 온 여행자.

당신은 왜 나를 나무라지 않는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당신을 불쌍하게조차 여기지 않는 나를?

당신은 미소 짓는다. 마당 징검돌같이 연이은 산 속에 벌레처럼 달라 붙어 사는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당신은 미소 짓는다. 시골 박물관의 마당 끝에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미소 짓는 당신. 새카만 세월의 흔적. 돌이 되어 있는 당신. 당신은 금이나 구리 따위가 아니다. 돌로 만든 조상의 그 분별이 자칫하면 안쓰러워서 나는 당신 앞에서 무심코 눈물 흘릴 뻔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가해하다. 밤의 해협을 넘어 처음 내 나라에 발을 디뎠으니 그래서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납득할 수 없다. 당신의 넉넉한 입언저리가 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일그러지지 않는가? 당신의 부드러운 눈의 윤곽에서 왜 피눈물이 흘러나오지 않는가? (이하생략)


시집 후기에서 나는 "이것이 나의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라고 썼다. 나에게는 일본어로 조국에 대해 쓴다는 것의 한계가 보였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조선어)로 쓰기에는 내가 지나치게 '일본인' 스러웠기 때문이다.


<언어의 감옥에서>, 서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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