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란엘] joker
“린디르!”
갑작스럽게 리벤델이 부산스러워지자마자 린디르는 리벤델의 입구까지 뛰어나갔다. 다른 방문객이라면 오겠다는 전갈을 받고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거나, 천천히 걸어 나가 손님을 맞이했거나 둘 중하나였겠지만 린디르는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잘 알고 있었다.
“스란두일님!”
요정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생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린디르는 리벤델에 스란두일이 들이닥칠 때마다 경험하고 있는 일 중에 하나였다. 엘론드에게 명이 깎이는 느낌이라고 엄살을 부려도 스란두일은 ‘요정 명이 깎여봐야 얼마나 깎인다고.’하고 대화를 막아버려 제대로 된 엄살조차도 부릴 수가 없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무슨 일이 있어야 친우를 보러오나?“
“아, 아니 그런게 아니고요.”
“엘론드는 어딨나?”
스란두일의 금색화관에는 보기 좋게 익은 벼이삭과 갈대가 꼽혀있었고 위로 뾰족하게 뻗은 왕관은 어디에 가서도 절대 굽히는 법 없는 스란두일에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을 만큼 어울렸다. 봄에는 화관이, 여름에는 푸른 잎사귀가, 가을에는 벼이삭이 흔들리는 왕관만큼 숲의 왕에게 어울리는 왕관도 없을텐데, 게다가 그는 굽히지 않는 나무처럼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하기 그지없기까지 했다. 린디르의 주관적인 소견으로는 가히 뻔뻔할 정도였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서 말해본 적은 없었지만.
“안쪽에 계십니다. 요즘 오르크 떼가 내려오는 일이 잦아서 아드님과 같이 지도를 보고 계실겁니다. 안내할까요?”
“됐네. 내가 가지.”
그는 린넨으로 된 베일이 벗겨지듯이 우아하고 부드럽게 엘크에서 뛰어내렸다. 요정들이 대개 그러한 가볍고 날렵한 몸짓을 가지긴 했지만 스란두일은 그보다는 배로 은밀하고 배로 조용히 움직였다. 아마 숲에서 오랫동안 은신하며 살아온 요정의 일족이라 그럴테지 싶은 생각을 하는 사이 린디르의 손에는 스란두일의 엘크의 고삐가 쥐여있었다. ‘그거나 잘 간수하게.’ 멀어지는 스란두일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하는 찰나 엘크는 제 주인을 꼭 닮아 도도하기가 짝이 없는 표정으로 린디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래뵈도 분명히 일루바타르의 첫째 자손이 맞는데 왜 저딴 동물을 눈앞에 두고 자신이 드워프 만큼 작아지는 기분을 맛봐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린디르의 심경은 스란두일이 방문할 때마다 그만큼 처참했다.
“엘론드”
“스란?”
격의 없이 애칭을 부르는 엘론드의 목소리에, 엘쌍둥이가 모두 지도에 두었던 눈을 거두고 저편에서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오는 스란두일을 바라봤다. 황금색 옷가지에 또 황금색으로 수 놓은 옷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지독하게 물질적인 무거운 존재감이 느껴졌고 엘라단과 엘로히르는 미간을 좁히곤 목만 가볍게 움직여 인사했다. 같은 요정인데도 포도주와 황금에 눈을 빛내는 스란두일을 엘쌍둥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데다가, 그가 리벤델에 올 때마다 엘론드가 여러 가지의 일로 곤란해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다음으로 스란두일이 꺼내는 말 같은 것들이 그랬다.
“오르크 떼가 온다고 셋이서 지도를 보고 있었다며? 켈레브리안의 그늘에 잠겨서 오르크 피나 보는 짓을 대체 언제까지 할건가?”
“...스란두일.”
여지없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표정없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속을 긁는 소리를 해대는 스란두일을 보고 엘쌍둥이는 미간을 좁혔지만, 엘론드는 둘이 나서기도 전에 팔을 뻗어 두사람을 제지했다. ‘둘 다 물러가 있어라. 손님 맞을 준비를 해두고.’. 리벤델에 마시는 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엘론드가 샤이어에서 맥주와 포도주를 가져다가 놓는 것은 저 진득하고 예의없는 손님 때문이었다. 켈레브리안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면 두 쌍둥이가 날뛰는걸 알고있는 엘론드는 둘을 물려놓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엘론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스란두일은 불쾌한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표정을 엘론드에게 되돌려주었다.
“린디르랑 똑같은 소리를 하나? 용건 없이 왔네. 안되는가?”
“자네에게 내가 안 된다고 할 것이 뭐가 있나. 그래도 엘라단과 엘로히르 앞에서 켈레브리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제발 관두게.”
스란두일은 엘론드가 권하지 않아도 엘라단이 앉아있던 의자 위에 몸을 뻗으며 앉아 엘론드를 올려다보았다. 표정 없던 눈매가 얄상하게 휘어져 마치 엘론드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고, 덕분에 엘론드는 엘쌍둥이가 모습을 감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못할 말을 했나? 둘 도 이제 엄마 찾을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스란.”
“네가 그렇게 감싸고 도니까 애들이 아직도 오크 피 보는데 환장해서 밖으로 나돌잖아.”
“...스란, 제발.”
“하기야 놀도르 피가 어디가겠나.”
“스란두일!”
스란두일이 말하는 ‘놀도르’의 피에는 아마도 엘론드가 가진 피와, 쌍둥이의 어머니인 켈레브리안이 갈라드리엘에게서 물려받은 피를 지칭하는 것이겠지만 엘론드는 스란두일의 말의 의미가 거기서 끝나지 않는 것을 듣는 순간 알았다. 스란두일의 부친이 단순히 놀도르를 싫어했던 요정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스란두일도 엘론드 자신과 엮이지 않았을테지만, 스란두일은 오래전 죽은 길갈라드까지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는 길갈라드를 마치 싸움을 좋아하는 놀도르의 왕 정도로나 여겼고, 엘론드가 그의 죽음에 아직까지도 목말라 하는 걸 보기 싫어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냐고 하면 스란두일에게는 당연히 후자였다.
“스란두일, 내가 자네를 손님으로 대접할 수 있게 해주게.”
“더 이상 하면 내쫓기라도 하려고?”
엘론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친우에게 이럴건가 엘론드?”
“객이라면 제발 객답게 굴게. 자네가 올 때마다...!”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다무는 엘론드를 보던 스란두일은 스산하게 웃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금발은 마치 황금처럼 보였는데, 그는 갈라드리엘과 같은 오래된 놀도리안을 제외하면 흔히 보기 어려운 색이었다. 스란두일은 그의 왕관처럼 날카롭고 가감 없는 사람이었고, 차라리 말을 아끼되 하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는 요정도 아니었다. 요정치고는 드물게 물욕에 솔직한데다가 지금처럼 엘론드를 상처 입히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 과연 어느 요정의 핏줄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알 길이 없었고, 엘론드는 이따금 그의 비뚤어진 성격이 푸른 숲이 어둠 숲이 되어버린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적어도 엘론드가 만난 스란두일은 처음부터 저런 종류의 요정이었다.
“내가 올 때마다 뭐, 심장이 파일 것 같은가? 아직도 숨이 막히나? 쌍둥이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나? 그도 아니면, 엘로스처럼 아르웬이 인간처럼 죽어갈까봐 그게 두려워지나? 내가 자네가 무서워하는 것들을 깡그리 뒤집어 놓고 가서 영겁을 사는 게 점점 자신이 없어지느냔 말야.”
스란두일의 표정은 여전히 날카롭게 벼려져있었다. 웃음은 자조하는 듯이 보였다가도 무서울 만큼 차가웠고 엘론드는 드물지 않게 보는 표정임에도 스란두일의 그러한 차가운 표정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했다.
“엘론드. 제발 작작 좀 해. 자네만큼 잃어버린 사람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자네만 모든 걸 잃어버리고 산건 아니니까.”
엘론드는 그가 아버지를, 그리고 그의 푸른 왕국을 잃어버린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은 그가 잃어버린 것들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푸른 잎사귀라는 이름을 가졌었던 것도 기억했다. 그럼에도 잊게 되는 것이다. 산맥에 깔린 서늘한 안개처럼 고요하고 차갑게 웃음 짓는 스란두일은 무언가를 잃은 사람보다는 탐욕을 일구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자네가 아무리 현자처럼 군다고,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자네를 엘라단과 엘로히르는 모를 줄 아나? 자네는 내 왕관보다도 더 위태롭고 자네 아들들보다도 약해. 차라리 칼을 들고 오크를 상대로 설치는 게 자네처럼 사는 것 보다는 백만 배 나을 걸세.”
“스란두일.”
엘론드는 목소리는 그 전보다 조금 작아졌다. 그는 스란두일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스란두일이 그를 샅샅히 파헤쳐 제대로 아물지 않은 딱정이들을 뜯어내는 손길을 막는 것에 급급했다.
엘론드의 목소리가 바람 앞의 등불만큼이나 작아지고 나서야 스란두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됐으니 만찬이나 들러 가지. 엘라단이랑 엘로히르가 날 왜 싫어하는지도 모르면서 혼자 고고한 척이라니. 현기증이 나니까 포도주를 마셔야겠네. 안내하지 그러나?”
식탁 위에는 풍성한 과일과, 넘치지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은 포도주, 겨우 별미나 될 법한 샤이어산 맥주가 올라와 있었다. 엘라단과 엘로히르는 손님에 대한 예의로나마 스란두일이 그 자리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얼굴을 마주친 뒤에 곧장 모습을 감추었고 아르웬이 먼 발치에서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사라졌다.
“별 빛이 흐리군.”
엘론드는 이번에도 역시 침묵했다. 포도주를 입안에 부어넣며 스란두일이 흘린 말이 아르웬이 꺼져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스란두일 보다도 엘론드가 그녀의 생명을 더 확실하게 가늠하고 있었다. 엘론드에게는 뇌리를 스치는 예지력이 있었고, 그는 지금까지도 그 수 많은 슬픔과 역사 사이에서 수 없이 그것을 겪어왔다. 단순한 바람만으로는 꺼져가는 별 빛을 살릴 수 없다는 것까지도 가엾은 리벤델의 군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별이 뜰 시각이 아니네.”
“내가 에아렌딜의 빛이라도 보고 그러는 줄 아는가?”
엘론드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고, 스란두일은 그의 궁상맞을 정도로 안타까운 대답에 웃음을 터트렸다. 천 년이 흘러도 아물지 못하는 상처들을 날카로운 칼로 파헤쳐 놓고 나서 스란두일은 그것이 만족스러운 듯, 안타까운 듯 애매한 표정으로 웃음지었다. 술통이 비도록 포도주를 비워도 그는 취하지 않았고, 몇 잔의 맥주를 마시고도 나태한 군주처럼 웃고 있었다. 포도송이 한 알도 입에 넣지 않고 엘론드는 돌로 세공한 의자 위에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스란두일을 기다렸다. 그가 술통을 비워내길 기다렸는지, 만찬이 끝나기를, 그도 아니면 무엇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게 엘론드는 오랫동안 느긋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만찬을 즐기는 스란두일을 기다렸다. 그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어쩌면 스란두일이 헤집어놓은 상처에서 피가 멈추기를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엘론드.”
스란두일이 다시 엘론드를 불렀을 때는 별이 뜰 시간이 되어서였다. 요정들이 가장 사랑하는 에아렌딜이 하늘 위에 떠있었고, 스란두일은 지금까지의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은 밤의 장막 너머로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듯이 무서우리만치 곧게 엘론드의 눈을 응시했다.
“사랑하네.”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한 톨의 흔들림도 없었고, 한 점의 흐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만큼은 그는 탐욕에 젖은 요정의 군주보다는 요정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말소리는 깨끗하게 개인 밤을 가로질렀다. 엘론드는, 눈을 감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 어떤 작은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네의 상처들이 아직도 보기 흉하게 남아 있는게 치가 떨리도록 싫어. 다시 칼집을 내면 이번에는 제대로 아물까, 이번에는 보이지 않게 될까, 그래도 끝끝내 아물지가 않더군. 그래도 또 하는 걸세. 또 칼집을 내고, 또 헤쳐 놓고. 이번에는 아물어라. 이번에는 제발 흔적도 없이 사라지라고.”
빌어먹을. 스란두일은 낮게 읊조렸다. 그러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난 아마 다음에도 또 그러겠지. 자네는 마음이 좋아서 또 받아줄거거든. 그때도 마시지도 않는 포도주를 리벤델의 식량창고에 쌓아놓고 나를 맞이 할테지.”
“....취한 것 같으니, 그만 들어가겠네. 자네는 돌아가고 린디르를 불러주게.”
엘론드는 말 없이 일어서 자리를 떴다. 엘론드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스란두일은 두 눈을 감고있었다. 엘론드가 난 자리에는 린디르가 돌아와 스란두일을 부축했고 그는 늘 자신이 리벤델에서 머물던 방으로 돌아갔다고, 후에 린디르가 엘론드의 방으로 와 전했다.
‘취하지도 않으셨으면서 부축 받으시고 대체 뭐하시는 분입니까 그분은? 제가 정말! 저보고 자기 엘크는 잘 뒀느냐, 너 먹는 것보다는 좋은 걸 먹여야한다고 끝까지 시비를 털...아니 끝까지 잔소리를 하십니다.’
엘론드는 스란두일이 취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보다 더 한 술독에 빠져 지내면서도 여흥에 취할지언정 술에 취해 흐트러지는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누구보다도 오래 살아낸 엘론드가 알고 있는 것들 중에 하나였다. 스란두일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진심을 말하는데 술 취한 척 할 만큼 당당하지 못한 겁쟁이도 아니었다. 그만큼 그도 무거웠을 것이다. 푸르죽죽하게 죽어버린 소싯적의 기억들 위로 휘청거리는 엘론드의 세월까지 감당하는 것은.
“린디르.”
“예.”
“...하루 더 머물다 가시라고 해라. 엘크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 같으니 좀 더 계시다 가라고.”
“네. 로드.”
완전 쌩쌩하던데요. 린디르는 그렇게 대답하려던 것을 누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스란두일이 방문하면 자신이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건 물론이고, 엘쌍둥이마저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데다가, 엘론드도 저렇게 축축하게 젖어있는 건 보통 일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엘론드는 늘 힘에 겨워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결국은 스란두일에게 지고 말았다. 그것이 지는 것인지, 아니면 져주고 있는 것인지는 제대로 알기 어려웠지만 아마 둘 다일지도 모른다는 게 막연히 린디르가 느낀 것 중에 하나였다.
저렇게 잔뜩 장맛비를 맞은 풀처럼 눅눅하게 쳐져있다가도 다음날이면 두 사람은 별 일 없었다는 듯 리벤델의 정원에 앉아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차라도 한 잔 마실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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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 리퀘. 리퀘 내용은 리벤델에 놀러온 스란두일이 엘론드 속 벅벅 긁다가 사랑한다고 히든카드 짠! 내밀어서 엘론드님이 녹는거였는ㄷ
엘론드 속 긁는 스란두일 원래 좋아합니다 쪼은 리퀘 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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